조용한 주택가에 썸타는 계단이라니 흉악하다.
썸은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뭔가 있는 거다. 그게 뭔지 모르니까 아직 둘이 애인이 아닌 거다. 뭔지 모르는 뭔가가 있기 때문에 친구도 애인도 아닌 관계가 멈추지 않고 진행된다. 그리고 확실히 알게 되는 순간 어디로도 튈 수 있는 관계는 고정된다, 남남이거나 지인 혹은 애인으로.
굳이 연애가 아니라도 뭔가 있다는 것에는 좋은 면이 있다. 여행을 갈 때는 그곳에 뭔가 있다는 생각에 이끌린다. 사실 나는 뭔가 있어야 뭔가를 한다. 학교도 뭔가 배울 것이라는 생각에 입학한 것이고 로또도 될 것이라는 생각에 산다. 뭔가 있다는 것은 긴장과 설렘을 줄 뿐 아니라 뭔가 할 수 있게 만들기도 한다.
날이 따듯해지면 마당에 개미들은 뭔가 있다고 생각하는 곳으로 열심히 간다. 그런데 내가 내려다보면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 가는 개미도 있다. 나는 개미가 향하는 곳을 이미 알고 있다. 내가 개미에게 뭔가 건질 수 있는 곳만 다닐 수 있는 완벽한 계획을 준다면 개미는 헛된 희망을 갖지 않아도 된다. 그렇지만 동시에 희망을 가질 필요도 없어진다.
계획은 뭔가 있는 것에서 좋지 않은 면을 제거하려는 노력이다. 계획대로만 되면 미래는 장밋빛이다. 계획 없이 난개발된 달동네보다는 잘 계획된 주거 단지가 좋다. 단순히 생존만을 생각해도 달동네와 계획 단지는 큰 차이가 난다. 예컨대 응급차가 제시간에 올 수 있는지만 생각해도 그렇다. 달동네의 좁은 골목을 아예 응급차를 생각할 정도로 여유 있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남영역에서 하행선을 향해 서면 보이는 단단한 흑색 건물은 정신없는 용산에 어울리지 않게 제대로 계획된 건물이다. 이 건축물의 독특한 점은 유독 5층의 창이 좁다는 것이다. 남영역을 나와서 방금 본 건물로 향하면 두꺼운 이동식 철제 바리케이드로 만들어진 정문이 눈에 보인다. 지금은 경찰청 남영동 인권센터가 된 이 건물의 옛 이름은 남영동 대공분실이다.
유독 좁은 창을 낸 5층은 불법 구금과 고문이 일어난 곳인데 지금은 개방되어있어서 올라가 볼 수 있다. 대공분실 5층 내부는 많은 고민 끝에 만들어졌다. 구금될 사람은 높은 정문을 넘고 건물 뒤에서 건물 안으로 인도된다. 여기서 끌려온 사람은 5층까지 좁은 나선형 계단을 타고 올라간다. 나선형 계단을 빙빙 돌기 때문에 자신이 몇 층에 왔는지도 모른 상태로 5층에 도착하게 된다. 5층 복도는 출구를 알 수 없게 모든 문이 똑같이 생겼다. 감시를 위해 문에 난 구멍을 통해 안을 바라보면 사각지대가 존재하지 않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각 실의 집기들은 자해를 막기 위해 고정되어있고 심리적 불안을 만들기 위해 흡음재를 설치했다. 대공분실은 잘 계획되고 만들어져서 구금자 입장에서 썸이 없다. 단단한 콘크리트 벽은 탈출의 여지도 없고, 사악하게 계획된 내부는 구금자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뭔가도 남기지 않는다.
대공분실을 보니 목적에 맞게 계획되고 실행된 것이 마냥 좋지만은 않다. 계획 없는 것이 좋다는 것이 아니다. 나도 응급차 빨리 오고 깨끗한 거리가 있는 동네에서 살고 싶다. 내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 충무로역에서 관광객은 뭔가 있다고 보는 것처럼 너저분한 동네에도 뭔가 있다는 생각이 필요하다. 좋고 깨끗한 것을 봤다고 전에 있던 것을 버리고 새로 잡는 것은 새로운 장난감이 생겨서 전에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엄마에게 주는 것과 다르지 않다. 옛날 장난감은 안좋았던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