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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순이와 동네 산책 일기

똑순이와 슬로프를 보고 오다.

오늘은 똑순이와 산책을 나왔다. 똑순이와 산책길은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산책길 중간에 도로 끝 표지판을 만나는데 여기까지는 똑같다. 도로 끝 표지판을 지나면 우리는 양 갈래 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길을 선택하는 규칙은 없다. 다만 비가 온 뒤면 포장되지 않은 오솔길을 피하고 차가 많은 주말에는 콘크리트로 포장된 길을 피한다.

콘크리트로 포장된 길은 표지판에서 봤을 때 오른쪽이다. 이 길을 따라 낮은 언덕을 넘으면 곧바로 슬로프가 보인다. 보통 여기까지 오면 똑순이와 잠시 숨을 돌리고 똑순이를 쓰다듬으면서 다시 집으로 돌아가자고 말한다. 이때 내가 의식처럼 하는 행동이 있다. 의식처럼 슬로프를 바라본 뒤에 발을 집으로 향한다.

나는 슬로프를 응시하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왜냐하면 일단 내가 스노우보드를 타기 때문이다. 수능을 마친 뒤 나는 스노우보드를 배웠다. 내 20대 초중반은 스노우보드로 꽉 차 있다. 대입 준비 같은 하기 싫은 일만 하다가 처음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해본 것이 스노우보드다. 스키장은 나에게 즐거움으로 가득 찬 곳이고 스키장을 보는 행동은 그 즐거움을 다시 불러일으킨다. 특히 내가 똑순이와 바라보는 스키장은 내가 첫 시즌을 보낸 곳이다.

또 다른 이유는 스키장을 일상에서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보기 힘든 것은 흥미를 자아내기도 한다. 영화관에서 판타지를 보거나 동물원에서 사자를 보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관에서 내 일상 영상이 나오고 동물원에 매일 같이 보는 고라니가 있다면 나는 가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에 있는 스키장을 통틀어도 20개가 되지 않는다. 그러니 볼 수 있을 때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다.

마지막 이유는 슬로프가 비정상적이기 때문이다. 산비탈에 나무가 없는 것은 정상일 수 있다. 그런데 슬로프는 단지 나무를 자르고 흙을 흐적여 놓은 것이 아니다. 슬로프가 그 상태를 유지하려면 배수로도 만들어야 하고 여러 보강을 해야 한다. 슬로프는 그냥 민둥산이 아니라 건물처럼 사람이 만들어낸 대상이다. 산 입장에 보면 우리가 재미를 위해 산을 기형적으로 수술해버린 결과가 슬로프다. 어렸을 때 친구의 상처를 구경하듯이 혹은 기형 쇼(freak show)를 보러 가는 것처럼 산에 난 기괴한 모습에 내 눈이 끌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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