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ies
서른 살 사촌의 우울(서른살 여행기)

맺는 말: 반성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기 전날 저는 여행 준비가 하나도 되지 않아서 정신이 빠져 있었습니다. 여행 당일까지 숙소는커녕 이 여행에서 가장 많은 중요하고 돈이 많이 드는 오로라 보기에 관한 준비도 하나도 되지 않았어요. 인도 비자 신청을 위한 사진도 공항 가는 길에 찍었습니다. 환장할 노릇이지요.
이 모든 게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는 안일한 생각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사람의 본성은 착하니 어딜 가나 도움받을 수 있고 어디에도 날 해치는 사람이 없다고 소박하게 생각한 건 아니에요. 되도록 쉽게 이득 보려는 사람 마음은 어디나 같을 거라고 본 겁니다. 돈 벌 기회인 수수한 여행자를 내쫓을 이유가 없고 위험을 감수하고 강도질할 만큼 제가 부티나지도 않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정신 나간 생각입니다. 사람 사는 거야 같지요. 배고프면 먹어야 하고 졸리면 자야 합니다. 먹고 자는 것만으로 보면 사람 사는 게 단순하지만 어디 이것만 가지고 사람이 살던가요? 저는 너무 당연해서 의식하지 못하는 많은 일을 하면서 일상을 보냅니다. 일상의 요소들은 동네마다 참 다르기도 하지요. 옷차림은 차차 하고 하찮게는 변기 모양까지 다 달라요. 여기서는 당연한 게 저기서는 용납되지 않을 일들이 있기도 합니다. 예컨대 좌측통행인 나라 고속도로에서 자연스럽게 우측통행을 하면 저승사자가 반겨줄 뿐이지요. 그나마 그동안 여러모로 경험하고 배운 게 있어서 이런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지 않고 돌아온 겁니다. 참 다행인 일이지요.
마지막으로 먹고 자고 이동한 거 그리고 통신같이 여행 중에 꼭 필요한 걸 빼고 내가 시간과 돈을 어디에 썼는지 살펴볼 겁니다. 돈이나 시간은 선택의 관점에서 보면 비슷해요. 나는 아무것도 안 하기로 한 여행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욕심부리고 빨빨거리면서 그 동네를 돌아다녔어요. 그 상황에 처해서 결정한 건 충동적인 일이지만 한편으론 이거저거 생각하지 않고 정말 내 마음 끌린 대로 한 겁니다.
시간은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오로라 보는 걸 빼면 박물관과 미술관 그리고 유적지에 가고 동네를 배회하는 데 쓴 게 주가 됩니다. 특이하게 도서관에서 보낸 시간도 있지요. 혼자서 박물관이나 돌아다니는 여행은 지루하기 짝이 없어 보여요. 유명한 음식점을 찾아다니지도 않고 사람들과도 최대한 부딪히지 않으려 했습니다. 저는 낯도 많이 가리고 시골에 살아서인지 사람으로 북적북적한 걸 좋아하지 않아요. 바티칸 미술관에서 긴 줄을 서거나 관광객들이 모여서 고개를 빼 들고 감탄사를 늘어놓는 곳을 견딜 수 있던 건 배운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저는 배운다는 생각이 들면 많은 일이 용납돼요. 버스 탈 줄 모르는 바보가 되어도 버스 타는 법을 공부했다는 생각을 하면 마음에 걸리는 게 없습니다. 평소에 싫어하는 사람 많은 곳에서도 배울 게 있다는 생각이 들면 괜찮아요. 관광하러 가서 도서관에 들어간 것도 마음 편한 장소가 공부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부수적으로 지출한 내용도 정리해 볼 겁니다. 돈도 시간 쓴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아요. 오로라 보는 데 쓴 돈을 빼면 박물관과 미술관 그리고 유적지 입장료가 주가 되고 인사치레를 위한 선물을 산 게 그 뒤를 잇습니다. 차 한 잔과 피자 한 판 산 게 내가 생존을 위해 먹지 않은 음식에 쓴 돈 전부에요. 그리고 줄 없는 공책 한 권 산 게 있습니다. 돈이 많지 않기도 했지만 전자상거래가 잘 발달되어 있어서 굳이 그 동네에서 꼭 사와야 할 물건도 없고 가는 곳마다 기념품을 사서 내 추억을 담지도 않으니 딱히 남의 선물 말고는 살 게 없었어요. 결국, 전 보고 배우는 데 대부분 돈을 썼습니다.
여행을 가기 전이나 돌아온 후나 똑같은 걸 보면 가슴 졸이고 안 하면 죽을 거 같은 열정은 쉽게 찾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런 시기는 내 삶에서 딱 철학과에 입학을 준비하던 반년과 학부 시절 2년뿐이에요. 하루하루 가슴 벅찬 삶이 어디 일상일 수 있을까요. 무기력해도 꾸준히 하다 보면 즐거움이 생기고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뭔가 해봐야 문제가 무엇인지 알게 되고 해법을 찾는 즐거움도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 투정하고 묵묵히 할 대상을 굳히고 꾸준히 해야 합니다. 물론 그 대상은 내가 의미 있다 생각하고 그 결과가 어찌 되었든 내가 선택했기에 긍정할 수 있는 게 될 겁니다. 그렇게 꾸준히 해서 누구와 함께 우리 안으로 여행기인 『마흔살 여행기』를 만들 능력과 환경도 갖출 겁니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