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래희망을 언제 적어 봤더라? 장래희망이란 칸을 채워 본 건 고등학교 3학년 때가 마지막이다. 장래희망을 찾아본 건 대학 신입생을 대상으로 한 진로 교양 과목 시간이 마지막이다. 심리 검사나 여러 직업 사례로 장래희망을 생각하는 시간이었다. 고등학교 때 장래희망 칸을 채우는 것이 강요에 의한 자백이라면 신입생 때 장래희망을 찾은 건 심문을 받고 어쩔 수 없이 인정한 꼴이다. 결국 둘 모두 장래희망이 없다고 말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지금은 아무도 나에게 묻지 않지만 예전에 장래희망은 늘 강요의 대상이었다.
장래희망은 낯간지러운 단어다. 예전에는 어른들이 장래희망을 물어볼 때면 부끄러워서 손발을 배배꼬며 과학자가 된다고 말했다. 그러다가 프로그래머가 되고 싶다고 했다. 이때 나는 노력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컴퓨터를 잘 아는 아이였기 때문에 덜 부끄러웠다. 지금 생각하면 자기가 좋아하는 게 뭔지 안 것만해도 대견스런 일이다. 사진기를 만난 뒤로는 장래희망은 기자였다. 고등학교에 입학해 언론에 관련된 학과가 높은 성적을 요구한다는 걸 안 뒤로 난 늘 배치표 앞에 부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실기 준비를 핑계로 방학 보충학습을 빼기 위해 고등학교 2학년 때 장래희망이 잠시 사진 작가로 바뀐 적도 있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장래희망이 이미 사회에서 인정받는 돈 벌 수 있는 방법이었다. 하고 싶은 걸 하면 해야만 하는 걸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런데 철학에 관한 몇몇 글을 보고 홀린 뒤 장래희망은 입 밖으로 내기 어렵게 되었다. 철학을 하면 뭐로 먹고 사는지 도통 모르겠는 점도 있지만 어느 철학자처럼 위대한 지성이 되겠다고 자처하는 건 내 성격에 도통 맞지 않는 일이다.
장래희망에 대해서 나는 운이 좋았다. 적어도 나는 장래희망을 강요받은 적이 없다. 억지로 강요 비슷한 기억을 찾아보면 이모네 가는 버스가 서초동 법원 앞을 지나갈 때 할아버지의 억울한 일을 처리한 엄마가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나에게 판사가 되라고 한 게 전부다. 그리고 운이 좋다고 보는 또 한 이유는 좋은 부모와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컴퓨터도 사진기도 책도 모두 내가 경험해 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아무것도 몰랐다면 혹은 부모의 기대를 그대로 대변했다면 나는 아무 감정 없이 장래희망을 말했을 거다.
지금은 아무도 나에게 장래희망을 묻지 않는다. 스스로도 잘 묻지 않았다. 하고 싶은 것을 하려 대학까지 다시 들어온 마당에 뭘 더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말해봤자 말하는 그 순간만 즐겁다. 앞으로를 위해 안절부절못하며 하나라도 뭔가 더 했으면 좋겠는데 이뤄지지도 않은 미래에 취하는 건 나중에 돌아보면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그래도 장래희망은 여전히 들으면 부끄럽다. 당당하게 앞으로 무언가 하겠다고 말하는 사람을 만나면 자신감이 부럽기도 하지만 명품이라는 둥 최고급이라는 둥 온갖 좋은 말을 가져다 붙이면서 변변찮은 물건을 하나라도 더 팔려는 장사치 같다는 생각에 어색하기도 하다.
영화 같은 일을 겪은 게 아니라면 앞으로 뭐 할 거라는 생각은 내 삶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는다. 내 머릿속으로 그리는 판타지는 마음에 들지 않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살게 하는 데 도움을 줄 뿐이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 현실에선 한 마디도 못하고는 머릿속으로 나중에 성공해서 앙갚음하겠다는 생각으로 현재를 이끌고 싶지도 않다. 큰 도움을 받고 나중에 더 큰 선행을 하겠다는 생각도 마찬가지다.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미래에 내 삶에 기반을 놓고 싶지 않다. 경험과 거리가 너무 먼 원대한 장래희망을 말하는 것도 다가오지도 않는 판타지를 더 정교하게 만드는 일이다.
장래희망 보다 중요한 건 지금까지 그 사람이 살아온 바다. 거창한 장래희망과 거리가 먼 지금까지 내 모습은 남들에게 설명하기 쉬운 일은 아니다. 지금 내 모습은 적어도 나는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수많은 사건이 뒤얽혀져 만든 거다. 개중에 정말 큰 원인이나 남들도 이해할 만한 원인이 있을 거다. 예컨대 어떤 책에 감동했다거나 좋은 사람이 지속적으로 영향을 줬다거나 테러에서 죽었다 살아난 일이 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에 신경 쓰기도 하고 별일 아닌 데 크게 의미를 두기도 한다. 공장에서 찍어낸 과자 맛에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거나 고작 몇 글자를 읽곤 세상을 다 얻을 것처럼 즐거울 때도 있다. 이런 자잘한 사건들이 얽혀 지금 나에게 영향을 준다. 내가 기억으로만 구성되지는 않는다. 뭔가 있을 수 있다. 나에 대해 그나마 말하기 쉽고 접근하기 쉬운 게 지금까지 내가 한 것들이다. 내 삶은 직접 경험한 두터운 내 과거에 근거해야지 알 수 없는 미래의 뜬구름 위에 놓을 수 없다. 지금까지 내가 이래 왔으니 앞으로 이럴 거라 말해야 한다.
지금부터 내 과거 하나하나를 되짚어 가기는 어렵다. 아쉽게도 난 뇌에 반도체를 넣을 수 있는 시대에 태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원인들은 사라지고 결과만 남은 일이 수두룩하다. 지금 나는 칙촉을 좋아하는데 어떤 이유에서 그런지 기억하고 살진 않는다. 그럼 할 수 있는 건 과거가 반영된 근래 내 모습을 잘 살피는 것뿐이다. 내가 어디에 시간과 돈을 쓰는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따위를 잘 살피고 여기에 내 미래를 근거지어야 한다.
일상에서 날 살피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없다. 늘상 하던 일이니 별생각 안 하고 산다. 같은 일상이어도 남다른 생각이 들긴 하지만 쉽게 지나치기 쉽고 빈도도 낮다. 새로운 환경에 처하면 나를 살피기 쉽다. 다른 조건을 만드는 건 지식을 얻는 기본적인 방법이다. 충전기를 콘센트에 꼽았는데 작동하지 않으면 다른 콘센트에 충전기를 꼽아 본다. 만약 되면 앞서 콘센트가 고장 난 거다. 복잡한 검진기로 콘센트와 충전기의 문제를 찾는 것보다 훨씬 쉬운 방법이다. 마찬가지로 나를 다른 환경에 놓이면 늘 파악하기 어려운 내 모습을 쉽게 환인 할 수 있다.
한편으론 무슨 여행기를 쓰나 싶었다. 기록과 보관이 쉬운 시대다. 차라리 사방에 카메라를 달고 모든 것을 보여주는 편이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인터넷 검색만 하면 직접 다녀온 나보다 많은 걸 알 수 있다. 그런데 여행은 모든 것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 기계가 사방을 기록하는 동안 내 눈은 아주 좁은 곳 밖에 보지 못한다. 다른 이와 같은 곳을 볼 순 있어도 시선이 머문 시간이나 시선의 움직임은 날 반영한다. 평소에 관심 있었던 것에 시선이 먼저 가고 눈길 한 번 더 주게 된다. 나만의 독특한 시선과 반응을 정리하고 관계지어 보고 싶었다. 그러니까 해외 여행기를 빙자한 내 안으로 여행기를 쓰고 있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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