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양 끝인 모스크바와 블라디보스톡의 시차는 7시간이다. 열차를 타면 하루에 한 번은 시간이 바뀌는 것을 체험할 수 있다. 일주일 동안 매일 시계가 느려지는 것은 골때리는 경험이다. 하루에 한 번만 들어도 짜증 나는 아침 알람이 두 번 울릴 수도 있고 밥을 먹었는데 또 밥때가 온다.
어렸을 때 <80일간의 세계 일주>라는 소설을 각색한 만화를 읽었다. 주인공이 친구들과 80일간 세계일 주를 할 수 있는지를 가지고 내기를 하는 이야기다. 물론 주인공은 가능하다고 하고 지구 한 바뀌는 돌았지만 81일째에 도착했다. 주인공은 망연자실했는데 사실 시차 덕분에 하루를 벌어서 내기에서 이긴다. 이 만화를 볼 때는 시차가 그렇게 궁금했다. 궁금했으나 나는 심각한 쫄보였기 때문에 어디 저 소설의 주인공처럼 지구를 한 바퀴 돌면서 시차를 체험하겠다는 포부는 갖지 못했다. 내가 늘 그렇듯 궁금해하다 잊히는 거지 뭐.
사실 시차가 궁금했던 것은 휴일을 더 오래 겪고 싶은 놀부 심보 때문이기도 하다. 해가 더 빨리 뜨는 서울에서 12시면 베이징은 11시니 휴일이 끝나기 전에 베이징으로 가는 거다. 그리고 베이징의 휴일이 끝나기 전에 또 서쪽으로 가고. 그러면 영영 쉴 줄 알았다. (날짜 경계선을 안 것은 좀 더 커서다.)
달콤한 것은 또 먹고 싶고 재미있는 것이나 흥미로운 것은 또 보고 싶다. 시차는 어렸을 적 나에게 늘 쉬고 싶다는 동화적 상상을 현실화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준 아주 흥미로운 대상이다. 그런데 이번에 난 이 흥미로운 시차를 아주 물리도록 경험했다. 어렸을 때는 초콜릿을 하나씩 밖에 먹지 못했는데 어른이 돼서 에비씨 초콜릿 한 봉지를 물리도록 먹는 경험과 비슷할까?
에비씨 초콜릿 한 봉지와 시차를 한 번 경험하는 것을 비교하면 규모의 차이가 너무 난다. 아마 규모가 더 큰 시차가 좀 아쉬워할 거다. 그러니까 시차를 이렇게 물리도록 경험한 것은 그냥 적당히 숨 붙이면서 나이 먹어서 될 일은 아니다. 그런데 나는 적당히 숨 붙이고 살기만 했으니 내가 신나는 경험을 물리게 할 수 있는 데에는 부모를 포함해서 참 많은 조력자가 있기 때문이다. 참 고마운 일이다.
한편으로 아무리 도움을 주고 등 떠밀어도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게 만들 순 없다. 그러니 이 여행에서 내 지분을 아주 조금은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내가 적당히 숨 붙이고 살았다고 평가한 내 과거도 그렇게 허접한 것만으로 채워져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허접하다고 생각한 많은 것들이 그렇게 무시할 만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도 했다. 여기에는 맥빠지는 가로 풍경이나 집과 회사만 오가며 자기 인생 못살고 부하에게 꼰대질이나 하는 아재, 이상한 투표를 하는 까스통 할배같은 부류가 포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