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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살 사촌의 우울(서른살 여행기)

사과소년

이제 모스크바 시간대에 들어왔다. 얼어 있는 강이 낯설지 않았다. 낮에 잠을 안 자니 시간이 참 안 갔다. 나중에 이 지루한 시간이 생각날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그 아쉬움 조차 까먹어서 또 소중한 시간을 낭비할 거다. 졸업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철학과에 다닌 시간들이 흐릿하다. 철학과에 오기까지는 참 많은 고민을 했는데, 왜 오게 되었는지도 잘 기억나지도 않는다. 그때 얻고 싶은 것을 난 얻었을까, 가고 싶은 곳으로 가까워졌을까?
열차가 출발했는데 사과를 준 사람이 없으니 차장이 찾았다. 사과 소년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곧 사과 소년이 돌아왔다. 그와 있을 때는 메모를 하지 못해서 기억에 의존해 말할 수밖에 없다. 사과 소년은 내가 열차에서 만난 사람 중 유일하게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사과 소년도 내가 흥미로웠던지 내 앞에 앉아있던 사람에게 양해를 구하고 둘이 자리를 바꿨다. 유치원 수준이지만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은 즐거운 일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여기서 사람은 생각을 소통할 수 있는 사람으로 고쳐야 한다고 잠깐 생각했다.
사과 소년은 카자흐스탄에서 러시아에 있는 대학교에 가고 있다고 했다. 지리학을 전공한다고 한다. 아까 사라진 것은 다른 칸의 친구들과 식사를 해서란다. 러시아로 유학오는 바람에 카자흐스탄에서 여자친구와 헤어졌다고 했다. 삼촌이 영국에 살았고, 자신도 영국에서 유학하고 싶은데 돈이 없다고 했다. 카자흐스탄보다야 러시아가 공부하기 괜찮고 소련으로 묶여있던 시간도 있으니 인적 교류도 어느정도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김기덕의 영화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리고 몇 가지 영화를 봤다고 말했다. 특히 6.25 전쟁을 다룬 영화가 흥미로웠다고 했다. 나는 카자흐스탄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으니 미안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 내 위 칸 사람이 그의 친구와 함께 앞에 사람이 읽다 놓은 책을 집었다. 그들은 책을 펴고 글을 손으로 가리키며 읽었다. 그러고는 재미없는 책이라는 듯 책 표지에 대해 서로 뭐라고 했다. 그의 친구는 내 신발에 대해서도 뭐라고 했는데 사과 소년의 말로는 신발 끈이 좌우 비대칭인 내 신발이 이상하게 생겼다고 한 말이란다. 사과 소년은 불편한 눈치로 그들이 덜 배웠다고 했다. 덜 배웠다고 뭐라고 하니 잘 배운 너가 그려러니 하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도 사과 소년은 은연중에 자신이 좀 더 나은 사람이란 생각을 드러냈다. 사실 사과 소년이 나에게 사과를 주고 나에게 메신저 아이디를 물어본 것도 사실 외국인 하나와 이야기해봤고 연락처도 안다는 사실이 좀 더 나은 자신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여튼 얼마 지나지 않아 사과 소년은 카자흐스탄 전통 털모자를 쓰고 떠났다.
나는 앞서 사는데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꼭 필요하다고 했다. 좀 다르게 말하면 나와 소통의 방식이 다른 사람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거다. 물론 우린 같은 사람 새끼니 적어도 아픈 것 정도는 배우고 못 배우고를 떠나서 서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의무교육도 받으니 소통의 방식이 완전히 다른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래도 이유야 어찌 되었든 서로 전혀 공감할 수 없어서 굳이 소통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덜 배웠다고 치부하고 말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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