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ies
어느 철학과 대학원생의 수기

새해 인사와 사람 구실

002.jpg오늘은 구정입니다. 지난주부터 대학원에서 알게 된 분들에게 새해 인사를 하고자 했는데 아직까지 미뤄놓고 하지 못하고 있어요. 기껏해야 전화나 문자로 하는 인사인데 개을러서 못한다는 건 변명이 되지 못합니다. 저는 아직 이런 일이 어색하고 부끄럽습니다. 몸이 학교에 다니니까 마음가짐도 철부지 학생에 멈춰 있는 모양입니다.

며칠 전 어린 사촌 동생의 졸업식에 다녀왔습니다. 고등학교 졸업식이었는데 방송부 학생들이 졸업식을 진행하는 게 꽤 그럴듯했습니다. 또 양복을 차려입고 온 졸업생도 있었는데 늠름해 보이더군요. 맡은 일을 해내고 양복이 잘 어울리는 아이들을 보니 어른스럽지 못한 변명으로 학생을 들긴 어려워 보입니다.

제가 철학 공부를 하겠다고 진로를 변경할 때는, 변변치 못하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걸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공부에 매달리느라 결혼도 못 하고 생활도 제대로 못 꾸리는 사람들의 삶이 괜찮아 보였습니다.

그런데 새해 인사도 못 하고 있는 절 돌아보고 있으니, 남들 다하는 사람 구실 못하는 게 참 괴롭습니다. 뭐 하냐는 질문에 학생이라고 흐지부지 말하지 않고 번듯한 직장도 갖고 결혼도 하고 사는 사람들이 부럽습니다. 결혼까지 이야기하지 않아도 앞서 졸업식에서 듬직해 보이던 아이들처럼, 사회에서 갈 곳 있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학생도 사회에서 한 역할을 하는 것 아니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전부터 철학 공부하는 사람은 사회에서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 않아 보입니다. 그래서 보통은 엄청 뛰어난 사람과 금수저 물고 태어나서 사는 걱정이 필요 없는 사람이 철학 공부를 했어요. 아쉽게 저는 앞에 두 종류의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 제가 사회에서 제 역할이 있다고 옹호할 방법은, 기껏해야 남들이 하찮게 여기는 것에 관심이 있고 이런 관심은 다양성 측면에서 사회에 도움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정도입니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