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톨릭의 부제 서품식을 보고 처음으로 예식이 멋있다는 생각을 했다. 10대 시절 TV를 통해서 서품식을 봤는데, 지금까지 봤던 예식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서품식 전체가 멋있다고 느낀 것은 아니고 부제 서품받는 사람들이 땅바닥에 엎드려 기도하는 한 장면이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다.
그때는 막연히 멋있다고 느껴졌지만, 좀 더 배운 이제는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한마디로 말하면 부제들이 땅바닥에 엎드리고 일어나는 예식은 매우 세련되었기 때문에 멋지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일단 부제라는 말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가톨릭에서 부제는 사제의 아래 단계에 놓인 직책인데, 사제가 되려는 사람이 거쳐 가는 과정일 수도 있고 종신토록 남는 자리일 수도 있다.
다른 예식처럼 여러 번의 기도와 찬양 그리고 회중들의 응답 같은 지루한 과정이 서품식 내내 이어진다. 그러다가 부제 예비자들이 성인들에게 기도를 드리는 과정이 시작되는데, 그들 앞에 하얀 천이 깔리고 부제들은 거기에 완전히 몸을 붙여 엎드려 한참을 기도하고 일어나게 된다.
여기서부터는 완전히 내 상상이다.
성직자는 아무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통해 신의 사랑을 현실에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성직자다. 천주교에서 신의 사랑은 자신의 아들을 희생한 사례로 나타난다. 그러니까 자신보다 더 소중한 것을 희생할 수 있음을 성직자를 통해 나타나야 한다.
성직자가 자기희생을 할 수 있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직접 시험에 빠뜨려 보거나 그런 희생 속에 살아남은 사람을 찾으면 된다. 그런데 이러면 아마도 성직자 찾는 일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에 비해 부제가 될 사람에게 스스로 땅바닥에 엎드린 뒤 일어나게 하는 예식은 권위만 있다면 성직자를 확보하기 위한 아주 영리한 방법이다.
직접 시험하는 일은 몹시 야만적이기도 하다. 자기희생을 할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부제 예비자를 전쟁통에 보낼 수는 없다. 신체 일부를 절단해보라고 요구할 수도 없는 일이다. 나는 누군가에게 내 성품을 시험당하고 싶지 않다. 그러니까 적어도 같은 인간끼리 시험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성직자가 될 사람이 스스로 그런 성품을 지녔다고 믿고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더러운 꼴 안 보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해야 한다. 땅에 완전히 엎드리는 행동은 나를 완전히 내려놓는 것을 뜻한다. 비슷한 행동으로 자신을 내려놓는 불교의 오체투지가 있다. 또 <<일리아드>>에서 친구를 잃은 아킬레우스와 아들을 잃은 프리아모스가 비통해하면서 땅바닥에 사지를 구르는 것은 사랑했던 사람이 가버린 죽은 자들의 세계인 지하로 손 내미는 장면이자 자신도 이승을 떠나고 싶다는 표현일 것이다.
다시 돌아와서, 성직자가 스스로 온몸을 땅에 붙이는 행위는 나를 희생하는 장면으로 볼 수 있다. 이 순간에 인간 아무개는 죽은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일어날 때는 인간 아무개가 아니라 부제 아무개로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야만적인 증명이 필요하지 않다. 이를 지켜보는 참여자들도 부제들이 사욕을 위해 거짓으로 예식의 형식을 따랐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실제 상황이 처했을 때 이 부제들이 정말 자기희생을 할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그렇지만 사람의 성품을 직접 시험할 수 없다면 스스로 할 수 있다고 믿고 다른 이들이 그 믿음에 지지를 보내주는 방식이 정말 그 성품을 가꾸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일 것이다.
정리하면 내가 부제 서품식이 세련되다고 생각한 것은 인간 신뢰에 대한 이상이 들어있음과 동시에 실용적인 목적이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