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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살 사촌의 우울(서른살 여행기)

시베리와 횡단 철도와 「닥터 지바고」

난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지닌 문화적인 부분을 잘 알지 못한다. 기껏해야 영화 <닥터 지바고>를 본 정도? <닥터 지바고>에서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뭐 그렇게 중요한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건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거리감을 모르고 한 소리다.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는 멀다고 하는데 체험할 수 없으니 감이 잘 안 온다. 내가 도시에 살 때는 버스 몇 정류장 혹은 지하철 몇 개 역 정도가 감이 오는 거리였다. 좀 외진 곳에 살고 이동 거리가 늘어나니 지하철과 버스 정류장 보다 긴 고속도로 진출입로를 기준으로 한 거리감이 생겼다. 버스 정류장 3개라고 말하듯이 중간에 진출입로가 3개 있다고 생각하는 식이다. 거리감은 직접 몸으로 디벼봐야 느껴진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내가 직접 걷지는 않았지만 주기적으로 덜컹거리는 기차소리와 지나가는 풍경들은 내가 거리를 체감할 수 있게 한다. 정말 엄청난 규모다. 단순히 지평선이 보여서 하는 말이 아니다. 열차는 침엽수림을 지나가니 탁 트이는 풍경을 볼 기회는 적다. 하루 정도는 같은 풍경에 지루해지는데 조금만 더 지나면 계속 같은 풍경이 지나간다는 사실에 묘한 두려움을 느낀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렇게 넓은 규모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영화 <닥터 지바고>에서 두 연인은 모스크바에서 만나지만 대륙을 관통하며 만남과 해어짐을 반복한다.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톡까지 두 사람의 사랑이 흩뿌려지는 매체가 바로 시베리아 횡단 철도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우연히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인천과 뉴욕을 오가는 연애를 하기도 하지만 내가 경험한 시베리아 위에서라면 좀 다른 느낌이 든다.

좀 다른 느낌이 드는 이유는 단순히 규모의 차이인 면이 크다. (한 두 사람한테 일이백 사기치면 잡범이지만 전 국민을 상대로 슈킹하면 위대해 보이는 것처럼?) 그리고 평온한 환경에서 큰 규모가 아니라 정말 사람 살기 힘든 곳에서 큰 규모다. 얼고 녹으면서 꿀렁이는 땅 위에 억지로 올려놓고 관리하는 끝이 보이지 않는 철도 위에 두 발 딛고 사랑하는 것은 비행기의 카펫이나 휴게소의 아스팔트와는 길이도 위태로움도 다르다.

부설하는 것은 뒤로하고 전철화하는데 70년이 넘게 걸렸다는 것은 이 철도의 규모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그 규모답게 지금도 철도 위에서 휴대전화 신호가 잡히는 곳이 잘 없다. 평소면 실시간으로 연락을 주고받았겠지만 이 철도 위에서는 그럴 수 없다. 생각나는 말들과 궁금한 것들을 한자 한자 적어놓고 휴대전화 신호가 잡힐 때 잽싸게 보내고 이전에 보냈던 메일의 답장을 읽었을 즈음 신호가 끊겨 다시 몇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시간을 두고 여러 말을 쏟아내니 답장이 엇갈리기도 한다. 만약 오해라도 생기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시베리아만 보고 있어야 한다. 이런 것들은 <닥터 지바고>의 두 연인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알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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