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를 졸업했다. 정말 가고 싶었던 철학과다. 나는 잘 다니던 건축공학 전공을 4학기째에 그만두고 잠시 여행을 다녀온 뒤 수능을 다시 봤다. 학교에 새로 입학하니 어색했다. 나이 차이가 나서이기도 하지만 나와 동기가 된 이들은 글도 잘 쓰고 말도 잘했다. 나는 뭐 했냐는 생각에 부끄러움이 추가 되었다. 시간이 지나고 철학과가 익숙해졌다. 마지막 학기는 읽어도 모른다는 생각에 책도 한 권 제대로 읽지 못했다. 관성대로 학교에 다니다 보니 졸업 사정에 문제없이 마지막 학기가 끝났다.
마지막 학기를 다니면서 어디든 여행을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다. 전에 학교를 관두고 한 여행을 긍정적으로 기억하기 때문이다. 이 여행 덕분에 나는 학교를 그만두어 싱숭생숭한 마음을 정리하고 철학과 입학 준비에 몰입할 수 있었다. 졸업도 하고 서른이 되는 마당이니 잠깐 끊어갈 필요가 있었다. 학교에 다니며 반복했던 일상에서 벗어나 지난 학부 시절도 반성하고 앞으로를 생각하고 싶었다.
내가 왜 오로라를 보고 싶어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모든 일에 늘 명확한 이유가 있지는 않다. 시규어 로스라는 음악 그룹의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는데 배경인 아이슬란드의 자연을 느끼고 싶다는 생각이 막연히 있었다. 그런데 고위도인 아이슬란드 하면 또 오로라 아닌가? 그래서 그렇게 된 거라고 추정할 뿐이다. 오로라 여행지를 검색하니 캐나다와 노르웨이, 아이슬란드가 나왔다. 캐나다는 너무 비쌌고 아이슬란드는 왠지 판타지로 남겨두고 싶었다. 노르웨이 트롬소는 관광 안내가 잘 되어 있었다. 그래서 노르웨이에 가기로 했다. 항공권을 검색하니 직항이 꽤 비쌌다. 여정을 끊어가면 유럽 여기저기를 돌아볼 수 있을 거라 판단했다.
어디 어디 갈까 생각하다 책장에 꼽혀있던 여행 안내서인 <<론니 플레닛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눈에 들어왔다. 오로라 말고는 목적이 없었고 그냥 밖을 돌아다녀 보고 싶었기에 숙박비가 들지 않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는 비용도 저렴하고 목적에도 부합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모스크바에서 노르웨이 직항은 가격이 살인적이었다. 값싼 항공권을 연결 하다 보니 아테네와 로마 그리고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가 중간 경유지로 선택되었다. 인천으로 돌아오는 길도 싸게싸게 하다보니 런던과 인도가 여정에 추가되었다.
2016년 12월 30일 저녁에 나는 다음 해 1월 7일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해서 모스크바에 도착하는 열차를 예매하기 위해 카드번호를 입력했다. 별생각이 없이 멍했다. 침대 2층보다 1층이 편하다는 말이 있어서 가장 가까운 시간부터 찾아보니 7일에 그나마 자리가 있었다. 자리를 고르고 결제 창에서 한참을 있다가 결제를 했는데 마침 오류가 났다. 사실 아무 의미 없는 오류지만 나는 나약한 사람인지라 가지 말라는 계시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다시 머뭇머뭇거리다 결국 결제했다. 여행의 설렘도 긴장도 없었다. 결제를 완료하고도 긴가민가했다. 인천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도 중간 여정도 아직 확정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뭘 타고 갈지 어디서 잘지도 아직 몰랐다. 열차 취소 비용 몇 푼이 아까워서 여행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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