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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살 사촌의 우울(서른살 여행기)

열차에서 일주일 – 시베리아 횡단 철도 1: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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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1] “그”에게 얻어먹은 음식들
내일이면 모스크바에 도착합니다. 드디어 거지꼴을 참지 못하고 처음으로 면도하고 머리를 감았습니다. 열차에서 씻는 게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닙니다. 다행히 왠지 쓸모가 있을 거라는 촉이 와서 다 먹고 버리지 않은 견과류 캔을 바가지로 사용해서 머리를 수월하게 감았지요. 견과류 캔을 버리지 않은 게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마음 가는 대로 했는데 일상이 수월해져서 꽤 뿌듯했습니다. 또 별 준비 없이 사 온 음식인데 얼추 부족하지도 남지도 않은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한 생명으로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능숙하게 생명 유지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흡족함 때문에 마음에 든 것이지요. 다르게 표현하면 이제 조금 어른이 되었다는 자부심 정도로 말할 수 있습니다.

일층에 누워 있으면 복도로 다니는 사람들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고 호그와트처럼 날아다니는 컵만 보입니다. 그렇게 누워 있다가 낮이 되면 잠에서 깬 이 층에 있는 사람이 아주 살포시 발끝으로 바닥을 감지하며 내려옵니다. 어제 새로 탄 사람이 내려왔습니다. 저는 테이블을 만들어주고 우린 서로 마주 보고 앉았습니다. 그는 위 칸에서 자기 짐을 꺼내기 위해 한쪽 신발을 벗고 1층 자리를 밟고 올랐습니다. 서울에서는 당연한 이 모습이 여기서는 무척이나 사려 깊어 보였지요. 심지어 그는 열차 안에서 금연도 잘 지켜서 역에 정차할 때만 담배를 피웠고 손톱도 잘 정돈되어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내려와서 밥 먹고 황급히 올라가서 누운 게 아니었기에 마주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학부 시절 교양으로 러시아어를 아주 조금 배워서 쉬운 단어 몇 가지를 알아먹을 수 있었고 뭔 욕심에서인지 러시아어 교제를 가지고 왔기에 책을 보고 이야기할 수도 있었습니다. 구글 번역기도 꽤 훌륭한 방법이지요.

허름하고 순박해 보이는 그는 지금 일자리를 향해 모스크바로 가고 있었습니다. 군대에 몸담았고 트랙터도 몰며 용접 자격증도 있었습니다. 지난번에 제 위에 있던 어린아이와 다르게 몸을 쓰는 일을 하기 때문에 낮에 몸을 곧추세우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몸을 늘 긴장 상태에 두고 풀어지지 않게 하는 게 습관 들어서 말이지요.

그에 비하면 저는 참 유약한 사람입니다. 사실 몸 쓰지 않는 일이 없기는 합니다. 하다못해 책 읽기도 몸이 튼튼해야 더 오래 많이 읽지요. 학부를 졸업하기까지 제가 몸이 힘든 적이 얼마나 있었는지 곱씹었지만 잘 생각해내지 못 했습니다. 이는 부끄러운 일이지요.

간절한 눈빛을 보내 그에게 밥을 얻어먹었습니다. 인스턴트만 먹다가는 죽을 거 같았기 때문이에요. 비계를 때지 않고 긴 막대 모양으로 자른 훈제 돼지고기는 짜고 씹다 보면 엄청 질겨집니다. 다른 요리들도 엄청 짜서 빵으로 짠맛을 씻어야만 했습니다. 빵은 유치원에 있던 플라스틱 빵 장난감처럼 생겼는데 분명히 맛도 둘이 비슷할 겁니다. 그는 손에 묻은 기름도 빵에 씻어 먹고 독일산이라고 저에게 캔디를 권했습니다. 어제의 기억이 있었기 때문에 날름 받아먹었습니다. 인스턴트 커피를 타 마셨는데 봉투를 젓개로 쓰더군요. 종이컵에 인스턴트 커피를 털어 넣고 껍질로 휘휘 젓는 건 우리나라만의 문화가 아닌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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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2] 젓개로 쓰인 커피 봉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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