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ies
서른 살 사촌의 우울(서른살 여행기)

열차에서 일주일 – 시베리아 횡단 철도 1: 만남

 

033.jpg
[그림33]사과 소년이 준 사과
모스크바 시간대에 들어왔습니다. 이제는 꽁꽁 얼어 있는 러시아의 강이 낯설지 않습니다. 낮에 잠을 안 자니 시간이 참 안 갔습니다. 여행이 끝나면 이 지루한 시간이 생각날 건 분명했어요. 그러나 전 다시 여행을 가면 이렇게 아쉬워했던 걸 까먹어서 저는 또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아쉬워할 겁니다. 그 이유는 전 늘 소중한 걸 마주했을 때 하찮게 여기고 뒤늦게 후회했기 때문이지요. 졸업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철학과에 다닌 시간들이 흐릿합니다. 철학과에 오기까지는 참 많은 고민을 했는데 왜 오게 되었는지도 잘 기억나지도 않습니다. 저는 그때 얻고 싶은 걸 전 얻었을까요? 또 제가 가고 싶던 곳에 가까워졌을까요?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복도 건너편에 앉은 스무 살 남짓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저에게 대가와 사과를 주고는 갑자기 복도 끝으로 사라졌습니다. 열차가 달리고 있는데 사과를 준 사람이 없으니 차장이 찾았습니다. 사과 소년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다행히 사과 소년은 곧 돌아왔습니다. 그와 있을 때는 기록을 하지 못해서 이제부터는 기억에 의존해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과 소년은 제가 열차에서 만난 사람 중 유일하게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사과 소년도 제가 흥미로웠던지 제 앞에 앉아 있던 사람에게 양해를 구하고 둘이 자리를 바꿨지요. 유치원 수준이지만 대화할 수 있는 건 즐거운 일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습니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더 정확히 표현할 수 있게 되었지요. 사람은 이야기하고 살아야 합니다.

사과 소년은 카자흐스탄에서 러시아에 있는 대학교에 가고 있고 지리학을 전공한다고 했습니다. 아까 사라진 건 다른 객차의 친구들과 식사를 해서랍니다. 삼촌이 영국에 살고 자신도 영국에서 유학하고 싶은데 돈이 없다고 아쉬워했습니다. 그나마 카자흐스탄보다 러시아가 공부하기 괜찮고 또 카자흐스탄과 러시아는 소련으로 묶여 있던 시간 덕분에 인적 교류도 있어서 다른 나라보다 오가기 더 수월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러시아로 왔답니다. 그는 김기덕의 영화를 좋아하고 그 외에 몇 가지 한국 영화를 보았다고 말했는데 특히 6.25 전쟁을 다룬 영화가 흥미로웠다고 했어요. 저는 카자흐스탄에 대해서 아는 게 없어 관심 보일 게 없으니 미안하다고 할 수밖에 없었지요.

복도 건너편에는 제 위층 사람과 그의 친구가 앉아 있었다. 그들은 그들 앞에 앉은 사람이 읽다 놓은 책을 집고 글자를 손으로 집어가며 읽었습니다. 그러고는 재미없는 책이라는 듯 책 표지에 대해 뭐라고 했지요. 그의 친구는 내 신발에 대해서도 뭐라고 했는데 사과 소년의 말로는 신발 끈이 좌우 비대칭인 내 신발이 이상하게 생겼다고 한 말이랍니다. 사과 소년은 불편한 눈치로 그들이 덜 배웠다고 했습니다. 저는 잘 배운 너가 그러려니 하라고 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 뒤로도 사과 소년은 은연중에 자신이 좀 더 나은 사람이란 생각을 드러냈습니다. 사과 소년이 저에게 사과를 주고 저에게 메신저 아이디를 물어본 것도 외국인 하나와 이야기해보았고 연락처도 안다는 사실이 좀 더 나은 자신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어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튼 얼마 지나지 않아 사과 소년은 카자흐스탄 전통 털모자를 쓰고 떠났습니다. 사과 소년과 시답잖은 말을 많이 해서 혀끝이 썼는데 그때를 다시 떠올리는 지금도 그렇습니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