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복도 건너편에 앉은 스무 살 남짓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저에게 대가와 사과를 주고는 갑자기 복도 끝으로 사라졌습니다. 열차가 달리고 있는데 사과를 준 사람이 없으니 차장이 찾았습니다. 사과 소년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다행히 사과 소년은 곧 돌아왔습니다. 그와 있을 때는 기록을 하지 못해서 이제부터는 기억에 의존해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과 소년은 제가 열차에서 만난 사람 중 유일하게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사과 소년도 제가 흥미로웠던지 제 앞에 앉아 있던 사람에게 양해를 구하고 둘이 자리를 바꿨지요. 유치원 수준이지만 대화할 수 있는 건 즐거운 일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습니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더 정확히 표현할 수 있게 되었지요. 사람은 이야기하고 살아야 합니다.
사과 소년은 카자흐스탄에서 러시아에 있는 대학교에 가고 있고 지리학을 전공한다고 했습니다. 아까 사라진 건 다른 객차의 친구들과 식사를 해서랍니다. 삼촌이 영국에 살고 자신도 영국에서 유학하고 싶은데 돈이 없다고 아쉬워했습니다. 그나마 카자흐스탄보다 러시아가 공부하기 괜찮고 또 카자흐스탄과 러시아는 소련으로 묶여 있던 시간 덕분에 인적 교류도 있어서 다른 나라보다 오가기 더 수월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러시아로 왔답니다. 그는 김기덕의 영화를 좋아하고 그 외에 몇 가지 한국 영화를 보았다고 말했는데 특히 6.25 전쟁을 다룬 영화가 흥미로웠다고 했어요. 저는 카자흐스탄에 대해서 아는 게 없어 관심 보일 게 없으니 미안하다고 할 수밖에 없었지요.
복도 건너편에는 제 위층 사람과 그의 친구가 앉아 있었다. 그들은 그들 앞에 앉은 사람이 읽다 놓은 책을 집고 글자를 손으로 집어가며 읽었습니다. 그러고는 재미없는 책이라는 듯 책 표지에 대해 뭐라고 했지요. 그의 친구는 내 신발에 대해서도 뭐라고 했는데 사과 소년의 말로는 신발 끈이 좌우 비대칭인 내 신발이 이상하게 생겼다고 한 말이랍니다. 사과 소년은 불편한 눈치로 그들이 덜 배웠다고 했습니다. 저는 잘 배운 너가 그러려니 하라고 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 뒤로도 사과 소년은 은연중에 자신이 좀 더 나은 사람이란 생각을 드러냈습니다. 사과 소년이 저에게 사과를 주고 저에게 메신저 아이디를 물어본 것도 외국인 하나와 이야기해보았고 연락처도 안다는 사실이 좀 더 나은 자신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어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튼 얼마 지나지 않아 사과 소년은 카자흐스탄 전통 털모자를 쓰고 떠났습니다. 사과 소년과 시답잖은 말을 많이 해서 혀끝이 썼는데 그때를 다시 떠올리는 지금도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