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수는 많은 것을 설명한다. 도면에 쓰인 숫자가 없다면 도면 그린 사람이 생각하는 공작물을 정확히 구현할 수 없다. 그런데 치수는 그 치수의 기준이 되는 스케일이 없으면 현실화되지 않는다. 도면이 나무막대를 100mm의 길이로 자르라고 지시한다면 자를 통해 100mm를 자를 나무에 표시해야 한다.
아주 오래전에는 신체를 스케일로 사용했다. 한 아름이라던가 한 걸음으로 과학적 단위를 대신했다. 지금은 약속된 표준 단위가 있다. 내가 생각하는 1cm와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1cm가 다르지 않다. 그래서 물건을 보지 않고 사는 것도 수월하다. 만약 인터넷 상점에서 옷의 크기를 미터가 아니라 실체 일부로 표현했다면 아무리 실물 사진이 있어도 구매하기 난감하다. 옷의 폭이 네 뼘이고 상인이 입었을 때 널널하다는 설명은 나에게 알려주는 것이 별로 없다.
옷의 수치를 알면 지금 있는 옷과 비교해서 나에게 얼마나 적당한지 알 수 있다. 너무 작으면 옷이 들어가지 않고 너무 크면 헐렁거리는 것과 다르게 아주 작은 수치의 차이 때문에 옷을 수선하기도 한다. 바지 기장이 약간 짧아서 어색하기도 하고, 약간 긴 소매가 상당히 불편하게 다가올 때도 있다.
옷을 사러 가면 굳이 미세한 수치를 살피지 않는다. 옷을 입어보면 얼마나 잘 맞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수치야 어떻게 되었든 결국 옷을 마주하는 것은 내 몸이다. 나는 엑스라지 상의를 입는다. 인터넷으로 엑스라지 셔츠를 구매했는데 맞지 않으면 셔츠가 불량이라고 생각하지 엑스라지니까 셔츠는 이상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내가 보내는 하루하루는 정작 내가 느끼는 것은 없고 수치만 있다. 계절에 따라 날씨가 어떻게 변하는지 인상에 남지 않고 강의는 시간표에 따라 늘 같은 2교시에 시작한다. 터미널에서 학교까지는 주변에 뭐가 있는지 얼마나 먼 길인지는 느껴지지 않고 그냥 8 정류장이다. 3년 동안 2시간 넘게 걸리는 학교 가는 길을 지났고 그 동안 수많은 것이 바뀌었을 텐데, 서초IC나 남부터미널역같이 쉽게 없어지지 않아서 스케일 삼을만할 것 빼고는 생각나는 것이 없다.
수능 영어 공부를 할 때, 공부만 하고 놀지 않으면 바보가 된다는 속담(All work and no play makes Jack a dull boy)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바보가 안 되려고 공부한다고 생각했다. 여기에 깔린 생각은 원래 바보인 상태에서 바보가 아닌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공부는 일상과 구별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굳이 스캐일이 없어도 몸으로 수치를 나타내듯이 매일같이 마주하는 것이 그렇게 하찮은 것이 아니다. 일상에서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바보가 책 속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