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열차가 이르쿠츠크 역에 멈췄다. 나는 이르쿠츠크를 귀에 못이 박이게 들었다. 고등학교 세계지리 시간에 세상에서 가장 추운 장소로 소개되었고 가장 춥다는 대표 성질 덕분에 시험에도 자주 등장했다. 세계지리 선생은 수업에서 이르쿠츠크가 나올 때면 오줌 싸면 얼어서 기둥이 된다는 소리를 하곤 했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이르쿠츠크를 지나간다고는 생각지 못했다. 러시아의 독특한 거소 신고 제도 때문에 이르쿠츠크를 상기했다. 러시아는 비자만 받았다고 맘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여행 중에 거소를 관청에 신고해야 하는데 이 기록이 명확하지 않으면 출국 시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한다. 열차 안에서는 당연히 거소가 없으니 문제가 생길 것 같았는데 러시아 대사관이나 외교부 자료가 명확하지 않아서 중간에 하루 머물 호텔을 찾다 이르쿠츠크가 눈에 걸렸다.
이르쿠츠크가 눈에 걸릴 때부터 이번 여행이 미묘하게 달라 보였다. 어쩌면 세계지리 덕후라면 한 번쯤은 가보고 싶은 곳이 이르쿠츠크 아닐까? 정말 세계지리 환자라면 이르쿠츠크에 가기 위해 지금도 열심히 햄버거 포장을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도 그렇다. 철도 덕후라면 이 기차 여행은 정말 죽기 전에 한 번 해보고 싶은 일일 거다. 그런데 나에게 이르쿠츠크는 출국할 때 귀찮은 일을 면할 곳으로 보일 뿐이고 시베리아 횡단 철도는 오로라를 보러 가면서 값싸고 오래 체류할 수 있는 수단일 뿐이다.
그렇다고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세계지리 덕후나 철도 덕후에게 꿈같은 일을 한 것은 아니다. 하다못해 뭐라도 조금 배우고 경험했으니 비행기 타고 노르웨이 갈 생각을 하지 않고 기차 탈 생각도 하고 여정도 꾸릴 수 있던 거다. 그렇지만 내가 이 여행을 위해서 특별히 노력한 것은 없다. 노르웨이를 직항으로 가는 것이나 여기저기 끊어서 가는 것이나 가격이 비슷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에게 갖춰진 것들이 여행을 위해 조합된 것뿐이다.
사실 나는 목적한 것이 얼마나 이루어지나 싶다. 유치원 때는 다 대통령 된다고 했고, 드라마 <카이스트>가 유행하던 초등학교 시절에는 모두 카이스트에 간다고 했다. 고등학교 때는 모두 스카이에 가고 싶어 했고 학부 졸업할 즈음에는 모두 돈 많이 주고 제때 쉬는 회사에 가기 원했다. 뭐 노력하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만 노력해도 안 되는 애들도 있잖나? 그럼 그 사람들은 노력을 덜 한 걸까? 노력하는 방법이 틀렸다고? 그럼 그 방법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은?
어디 꿈같은 세상이 아니니 노력한다고 일등 하는 것도 아니고 일등 했다고 노력한 것도 아니다. 운도 노력이라고? 그건 맞다. 열심히 노력하며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다니는 안 군과 책가방도 없이 탱자탱자 학교 다니는 김 군이 같이 걸어가다 하늘에서 돈 비가 내리면 노력하는 안 군은 가방에 더 많은 돈을 담을 거다.
그러니까 세상 뭐 열심히 할 게 없다는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세상은 내 맘대로 되지 않고 예측하기도 어렵다. 일단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건 적어도 세상보다는 내 마음대로 되는 나뿐이다. 그런데 내가 하는 노력이 우발적으로 보이는 목표를 향하고 결과가 내 생각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그만큼 허무한 일도 없다. 그러니까 노력 하나하나가 나에게 의미 있어야 한다. 미래를 위해 지금 뭔가 참고 노력하는 것이 안 좋다는 것이 아니다. 만약 내 생각대로 그 미래가 풀리지 않아 아쉬워도 적어도 자신은 그 과정을 긍정하고 의미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구조가 개인을 결정한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런 구조 속에서 자신을 자살할 정도만큼 실존성은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