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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살 사촌의 우울(서른살 여행기)

위 칸 사람

모스크바를 향한 지 6일째다. 오늘은 드디어 거지꼴을 참지 못하고 처음으로 면도하고 머리를 감았다. 왠지 쓸모가 있을 거라는 촉이 와서 다 먹고 버리지 않은 견과류 캔이 있었다. 촉대로 머리를 감기 위해 바가지로 잘 썼기에 꽤 뿌듯했다. 그리고 별 준비 없이 음식도 사서 쟁였는데 얼추 부족하지도 남지도 않은 점도 뿌듯했다. 이제 먹는 것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능숙하게 되는 점 때문에 뿌듯한 것이다. 한 생명으로 생명 유지에 능숙해진 것에 대한 뿌듯함.
1층에 누워있으면 복도로 다니는 사람들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고 호그와트 마냥 컵만 날아다니는 것이 보인다. 그렇게 누워있다가 낮이 되면 이 층에 있는 사람이 아주 살포시 발끝으로 바닥을 감지하며 내려온다. 어제 새로 탄 사람이 내려왔다. 테이블을 만들어주고 서로 마주 보고 앉았다. 그는 위 칸에서 자기 짐을 꺼내는데 한쪽 신발을 벗고 1층 자리를 밟고 올랐는데 당연한 이 모습이 여기서는 그렇게 사려 깊어 보였다. 심지어 금연도 지켜서 역에 정차할 때만 담배를 피웠고 (손톱도 잘 정돈되어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내려와서 밥 먹고 황급히 올라간 것이 아니라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학부 시절 교양으로 러시아어를 아주 조금 배워서 쉬운 단어 몇 가지를 알아먹을 수 있었고, 뭔 욕심에서인지 러시아어 교제를 가지고 왔기에 책을 보고 이야기할 수도 있었고, 구글 번역기도 꽤 훌륭한 방법이었다.
허름하고 순박해 보이는 이 사람은 지금 일자리를 향해 모스크바로 가고 있었다. 군대에도 복무했고 트랙터도 몰며 용접 자격증도 있었다. 지난번에 내 위에 있던 어린아이와 다르게 몸을 쓰는 일을 하기 때문에 낮에 몸을 곧추세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몸을 늘 긴장에 두고 풀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습관들어서 말이다. 이런 것에 비하면 나는 참 유약한 사람이다. 사실 몸 쓰지 않는 일이 없기 때문인데 하다못해 책 읽기도 몸이 튼튼해야 더 오래 많이 일을 수 있다. 학부를 졸업하기까지 나는 몸이 힘든 적이 얼마나 있었을까. 부끄러운 일이다.
간절한 눈빛을 보내 그에게 밥을 얻어먹었다. 인스턴트만 먹다가는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비계를 때지 않고 긴 막대 모양으로 자른 훈제 돼지고기는 씹다 보면 엄청 질겨졌다. 그리고 다른 요리들도 엄청 짜서 빵으로 짠맛을 씻어야 했다. 빵은 흡사 유치원에 있던 플라스틱 빵 장난감처럼 생겼는데 그 빵을 먹으면 이 빵 맛이 날 것이 분명하다. 그는 손에 묻은 기름도 빵에 씻어 먹고는 독일산이라고 나에게 캔디를 권했다. 어제의 기억이 있었기 때문에 낼름 받아먹었다. 또 인스턴트 커피를 타 마셨는데 봉투를 젓개로 썼다. 종이컵에 맥심을 넣고 껍질로 휘휘 돌리는 것은 우리나라만의 문화가 아닌 것이다.
이제 모스크바까지 24시간도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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