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각기동대>의 주인공은 기계의 몸과 인간의 뇌를 지닌 혼종이다. 나는 혼종이 아닐까? 라투르는 사회 속 개인을 인간과 비인간의 복합체로 본다. 벌거벗은 나폴레옹이 유럽을 휘젓고 다니지 못했을 것이다. 무기도 있고 말도 있고 옷도 있고 그래야 유럽을 돌아다니지, 어디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고 해도 벌거벗고 카리스마를 풍기지는 못한다.
좀 다르게 생각하자면, 자판기 안에 사람이 들어있든 정말 기계 자판기든 내가 음료수를 뽑아 먹는 데는 별반 다를 게 없다. 음료를 주는 행위자를 생각했을 때, 완전한 인간이 주는 음료를 굳이 열망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자판기 안에 든 사람이 준 음료수가 기계가 준 음료보다 더 맛있을 리 없다.
인간을 기계와 구분해보려는 학문적 태도 말고, 순수한 인간이길 바라는 것은 기술 시대를 사는 것과 잘 맞지 않는다. 물론 손으로 농사도 짓고, 양잠해서 실도 뽑고, 뭐 그렇게 하면서 기계와 멀리 떨어지는 방향으로 살 수 있다.
그런데 찝찝한 것은 기계와 멀어지는 방향으로 사는 생각을 하기까지 기계의 도움이 필요하고 저런 생각을 모으고 공유하고 발전하는 데도 기계의 도움이 필요한 사회라는 점이다. 뜨거운 것도 만져봐야 뜨거운 줄 안다. 그리고 만져본 손에는 이미 흉이 졌다. 기계도 겪어봐야 하는 것이기에, 이미 기계에 반대한다는 생각까지 이르는데 기계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에 찝찝해 하는 것은 되려 유아적인데, 흉 있는 내 몸이 완벽하지 못하니, 이번 생은 글렀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용산에서 본 풍경은 둘 간 혼종이 아니라 많은 것들의 혼종이다. 단순히는 건물 외관에서 돈이 많이 들여 꼼꼼히 마감한 전면과 그렇지 못한 보이지 않는 면이 섞여 있기는 것을 볼 수 있기도 하고, 복잡하게는 필요에 따라 이것저것 이어 붙인 모습을 볼 수 있기도 하다. 지금 이런 모습이 현실이니,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과 깨끗하게 정리를 해야 한다는 생각 중에 어느 것이 덜 유아적인 것일까? 그대로 받아들이자는 것은 몸에 흉이 있으니 이번 생은 글렀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태도 아닐까? 깨끗하게 정리하자는 것은 흉을 아예 인정하지 않는 태도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