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 횡단 철도에 오른 지 4일 째다. 창밖은 나무 종류가 조금씩 변하기는 했지만 늘 같은 풍경이 지나간다. 보이는 건물들도 소련의 영향인지 모두 비슷비슷하다. 밖과 다르게 열차 안은 따듯하다. 옆자리에서는 한 할배가 허리 아픈 할매를 눞혀놓고 고쳐보겠다고 뭔가 열심히 하고 있다. 먹을 것을 가득 싼 봉지도 가벼워졌고 알파벳을 잘못 읽고 산 탄산수는 이제 어느 정도 맹물이 되었다. 평소처럼 먹고 바로 버리지 않은 견과류 캔을 바가지 삼아 머리도 감았다. 여전히 말은 안 통하지만 이제 이 공간이 낯설지 않다.
낯선 것들이 익숙해 질 때쯤이 되면 이제 변하는 것은 없고 모든 것은 이대로 끝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지금은 중요하지 않게 되고 다음 단계를 고민한다. 나는 모스크바에 내려서 뭐할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오로라 보는 것의 보너스 격이니 테트리스에 나온 그 궁만 보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모스크바가 가까워 오니 욕심이 난다. 휴대전화 신호가 잡히는 역에 정차하는 오분에서 십분 남짓한 사이에 열심히 정보를 갈무리하고 열차가 출발하면 읽었다.
당연히 배터리가 남아날 리가 없다. 모스크바에 도착해서 배터리가 없으면 호텔도 찾아갈 수 없고 추운 환경에서 효율이 더 떨어지니 배터리를 잘 사용해야 했다. 그런데 이 열차 안에서 충전하기는 녹녹하지 않다. 이날은 콘센트 때문에 열차 안에서 큰 소리가 오갔다. 나는 눈치껏 충전기를 꼽았는데 누군가 내 충전기를 빼고 자신의 충전기를 꼽아놔서 썩 많이 충전할 수 없었다. 또 충전기가 될 때가 있고 안 될 때가 있는데 도대체 언제가 되는지 알 길이 막막했다. 하루 종일 배터리 충전에 눈 빠진 날이다. 점심때는 콘센트 옆에 붙어서 휴대전화를 어느 정도 충전했다고 너무 좋아하기도 했다.
문득 쌩돈 들여서 시베리아까지 왔는데 배터리 충전에 마음 쓰고 있는 내가 안쓰러웠다. 그래서 가진 배터리를 계산 해봤다. 노트북의 배터리와 외장 배터리 하나가 있으니 이걸 조금씩 아껴 쓰면 도착 전에 휴대폰을 절반 넘게 충전할 수 있는 계산이 섰다. 그리고 배터리 충전을 포기했다. 어찌 되었든 이 날 내가 가장 신경 쓴 것은 배터리 충전한 일뿐이다. 여행하고 있다는 생각도 잊고 하루 종일 콘센트만 흘긋거리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뭐한 짓인지 모르겠다. 돌아가면 귓방망이를 한 대 후리고 휴대전화를 빼앗아 왔을 것이다.
물론 배터리 충전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 난 열차가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배터리나 신경 쓰고 있는 동안에도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잘 알고 있었다. 딱 한 달만 지나면 충전하느라 놓친 열차의 소리나 냄새, 사람들의 온기, 창밖 풍경들이 엄청 그리울 걸 알았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여기서 배터리 충전에 몸과 마음을 쏟는 것도, 지금은 후회해도 나중에 다르게 받아들일지도 모를 일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갈팡질팡하고 있었지만 나는 한편으로는 마음이 그렇게 불안하지 않았다. 내가 목적 없이 잉여 짓을 해도 열차는 모스크바를 향하고 있다. 뭐하나 똑 부러지게 못 해도 결국 나는 목적지로 향하고 있다. 가만히 있으면 가마니가 된다는, 뭔가 하나라도 더 시도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부담을 열차는 나를 대신해서 지어준다.
고작 사흘 반복된 환경에 익숙해졌다고 어찌할 바 모르던 나는 곧 창밖을 넋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시베리아 위에 있는 동안 처음으로 눈이 내렸다. 쌓인 눈이야 널렸지만 눈 내리고 있으니 또 다른 세상이다. 늘 한 치 앞도 모르는데 나는 또 익숙한 지금이 계속될 거라고 속단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