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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살 사촌의 우울(서른살 여행기)

익숙함 – 런던: 히드로 공항

[그림122]좌측 통행 표지
[그림122]좌측 통행 표지

영국 하면 생각나는 건 아직도 책장 한켠에 놓고 읽지 못한 흄의 책과 어렸을 때 신나게 읽은 해리포터입니다. 제일 처음 런던을 접한 건 아마 둘리 영어 학습 비디오일 거예요. 어금니가 영어로 뭔지 맞추지 못하면 안 되는 상황에서 “몰라”라고 한 대답이 정답이었던 장면이 있는 만화지요. 주인공 중 누군가가 버킹엄 궁전의 움직이지 않는 근위병 앞에서 깐죽거리다 동전을 떨어뜨렸는데 근위병이 동전을 밟고 움직이지 않는 장면이 제 런던에 대한 기억의 처음입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런던은 정말 컸습니다. 조명이 들어온 축구장이 눈에 많이 보입니다. 히드로 공항에 내려 입국 심사대로 갔습니다. 승무원이 입국 신고서를 나눠주지 않았기에 아무 생각 없이 줄에 있었습니다. 저 앞에서 공항 직원이 뭐라 말하고 몇몇 사람이 줄에서 잠시 멈춰 뭔가 적었는데 곧 나도 뭔지 알게 되었습니다. 한 직원이 짜증스럽게 국적을 묻고 귀찮은 듯이 입국 신고서를 나눠 줬어요. 안하무인한 놈이지만 투덕거릴 것도 아니고 그냥 그러려니 했습니다. 입국 심사관은 꽤 친절했어요. 다음 여정이 어디냐고 물어 내 가정이라고 했지요. 이제 여행이 다 끝나가는 걸 실감했습니다.
일반 지하철을 타러 갔어요. 피카딜리 선이랍니다. 이 동네는 지하철 노선을 번호로 구분하지 않습니다. 피카딜리 선은 당연히 피카딜리 서커스 역에 섭니다. 전 런던 한복판에 서커스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서울에서도 왜 피카디리 극장이 서커스의 이름을 딴 건지 궁금해 했습니다. 이튿날 이 역에 가보고 서커스는 곡예단뿐 아니라 광장이란 말로도 쓰다는 걸 알았어요. 좌측통행하란 표지를 보고 런던이란 걸 실감했습니다. 공항 역사 안에서는 역장이 계속 노란 선 밖으로 물러서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해리포터에 나오는 악덕 사감이 생각나서 혼자 피식거렸어요.
아무리 입국 심사관이 친절했어도 안하무인한 놈을 생각하면 기분이 안 좋아진다. 대부분 국가는 스스로 억울함을 푸는 걸 금지한다. 내가 맞았으면 국가에게 때려달라고 해야지 내가 직접 때리면 나도 같이 쇠고랑 찬다. 구제 방법은 민사와 형사 소송이 있을 거다. 민사 소송이야 정말 억울하고 힘없어서 법률구조를 받을 수 있는 경우 아니면 내가 뛰어다녀야 하고 검사가 원고석에 앉는 형사소송도 검사가 집에 와서 이야기 듣고 소송해주는 건 아니다. 둘 다 여간 귀찮고 돈 들어가는 일이다. 법이 일상에 딱 맞춰 이뤄진 것보다 좋은 건 없지만 국회에서 다수가 합의해야 하는 형태로는 변화하는 현실을 잘 맞출 수 없다. 합의 과정 중에 이미 현실은 변한다. 모두 공평하게 자신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법률 비용이 낮아져야 하는 건 맞지만 일상의 모든 일이 법원으로 갈 수도 없고, 그렇다 해도 일상만큼의 법원이 있는 건 같은 크기의 모형 건물을 지어 본 뒤 다시 본 건물을 짓는 거랑 똑같은 꼴이다. 이상적 정의에 딱 맞는 현실은 없다. 그러니까 안하무인한 그놈은 그냥 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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