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한 지 삼일 정도 되니 열차 생활이 꽤 몸에 익었습니다. 낯선 것들이 익숙해질 때쯤이 되면 이제 변하는 건 없고 모든 건 지금 경험했던 것처럼 끝난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다음에 할 일을 걱정하게 됩니다. 저는 모스크바에 내려서 뭐 할지를 고민했습니다. 모스크바에 머물게 된 일은 오로라 보는 것의 보너스 격이니 테트리스에 나온 궁만 보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모스크바가 가까워 오니 하나라도 더 보고 싶은 욕심이 납니다. 그래서 휴대전화 신호가 잡히는 역에 정차하는 오분에서 십분 남짓한 사이에 열심히 모스크바에 대한 정보를 갈무리하고 열차가 출발하면 읽었습니다.
휴대 전화를 계속 보고 있으니 당연히 배터리가 남아날 리 없습니다. 모스크바에 도착해서 배터리가 없으면 숙소도 찾아갈 수 없고 또 추운 환경에서는 방전 효율이 더 떨어지니 배터리 용량을 잘 유지해야 했어요. 그런데 이 열차 안에서 충전하기는 녹록하지 않습니다. 사용할 수 있는 콘센트가 두 개뿐이고 그마저도 작동하지 않을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콘센트 쟁탈전이 심한지 충전 때문에 열차 안에서 사람들 간에 큰 소리가 오가기도 했습니다.

이날 제가 가장 신경 쓴 건 배터리 충전한 일뿐입니다. 거의 반나절을 휴대전화 충전에 허비했습니다. 여행하고 있다는 사실도 잊고 하루 종일 콘센트만 흘긋거리고 있었지요. 문득 쌩돈 들여서 시베리아까지 왔는데 배터리 충전에 마음 쓰고 있는 제가 안쓰러웠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진 배터리 용량을 계산해 봤어요. 노트북의 배터리와 외장 배터리 하나가 있으니 이걸 조금씩 아껴 쓰면 도착 전에 휴대폰을 절반 넘게 충전할 수 있다는 계산이 섰습니다. 그러니 충전은 이제 그만 신경 쓰기로 했지요.
전 배터리나 신경 쓰고 있는 동안에도 이 순간이 얼마나 귀중한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딱 한 달만 지나면 충전에 정신 팔려 있는 동안 지나간 열차의 소리와 냄새, 사람들의 온기, 창밖 풍경들이 엄청 그리울 걸 알았지요. 한편으로는 여행 와서 배터리 충전에 한눈판 걸 당장은 후회해도 시간이 더 지나면 그땐 어려서 그랬다며 추억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어요.
아까운 시간을 부여잡고 갈팡질팡하고 있었지만 저는 마음이 그렇게 불안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목적 없이 아무거나 해도 열차는 모스크바를 향하고 있습니다. 뭐하나 똑 부러지게 못 해도 결국 저는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뒤처지니 뭔가 하나라도 더 시도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부담을 열차가 저를 대신해서 지어줍니다.
고작 삼일 반복된 환경에 익숙해졌다고 어찌할 바 모르던 저는 곧 창밖을 넋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시베리아 위에 있는 동안 처음으로 눈이 내렸습니다. 쌓인 눈이야 널렸지만 눈이 내리는 중에 시베리아는 또 다른 세상으로 변합니다. 늘 한 치 앞도 모르는데 저는 또 익숙한 지금이 계속될 거라고 속단하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