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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살 사촌의 우울(서른살 여행기)

지구에 육박하다 – 시베리아 횡단 철도 2: 나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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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5] 회색 바탕에 빨간색으로 강조를 준 어느 역의 입면 – 왼쪽으로는 먼저 있던 상아색 칠이 보입니다.

도착 하루 전이 되니 『론리 플레닛 시베리아 횡단 철도』 표지에서 본 풍경이 창밖에 나타납니다. 아무 짓도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모스크바 향한다는 마음에 불안이 덜했습니다. 놀지 말고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쫓기지 않으니 너무나 여유로워서 시간이 잘 가지 않았어요.
 
모스크바에 가까워서인지 철도역과 안내 표지 디자인이 회색 바탕에 빨간색을 쓰는 모양으로 통일되어 갑니다. 그 전에는 회색 바탕에 빨간 표시는 열차 외장에서만 볼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 역은 서울에서 보기 힘든 상아색이나 터키옥색이었지요.
 
고작 모스크바에 도착하는 일입니다. 이 여행의 목적인 오로라 근처에는 가지도 못 했어요. 아직 여행이 한참이나 남았습니다. 그런데 목적지가 정해진 엄청 긴 거리를 거의 다 이동했다는 생각을 하니 여행이 하나 마무리되는 느낌입니다.
 
저는 끝난다는 생각이 들면 그간 있던 일을 돌아보고 앞으로 어떻게 살지 생각하곤 합니다. 이 습관은 지금 당장을 보지 못하고 오지도 않을 미래를 걱정하면서 지나가 버린 과거에서 애써 교훈을 찾아보려 한다는 점에서 좋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가 보낸 시간들이 늘 좋지만 않았을 텐데 그 과거가 아까워서 어떻게든 이미 흘러버린 일에서 의미를 짜내서 좋게 간직하려는 일이기 때문에 좋지 않은 습관입니다. 낭비한 시간도 제가 보낸 시간이니 그대로 인정해야 하는데 전 아직 그러지 못하고 있습니다.
 
열차 안에서도 별반 다를 건 없지요. 전 다음 문단처럼 열차를 탄 의미를 찾고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 우리 집 안방에는 삼성 텔레비전이 있었고, 브라운관 하단 중앙에는 “SAMSUNG”이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어린이집 다니는 꼬맹이였고 영어를 배우지 못했지만 저 영어는 분명 “삼성”이라고 읽을 거로 추측했는데, “SAMSUNG”은 음소가 7개이고 “삼성”은 음소가 6개로 다른데 왜 똑같이 “삼성”으로 읽는지 궁금해서 골똘히 생각하곤 했다. 이러던 꼬맹이가 어설프게 영어도 배우고 러시아 알파벳도 읽을 줄 알며 모스크바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은 나에게 의미 있는 일이다.

 
또 아래 문단처럼 학부를 마친 뒤 얼빠진 제 모습을 곱씹어보기도 했습니다. 멍청하게 흘려보낸 시간들을 잘 정리해서 다음에 그러지 말자는 교훈이라도 만들고 싶었거든요.

내가 철학과를 졸업하고 정신이 빠진 건 어떻게든 될 거라는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못 할 거 같은 과제도 기한이 닥치면 해결되거나 정말 못 견딜 거 같은 상황도 실상 처하면 어떻게든 살게 된다는 걸 그 조금을 살면서 경험하고 은연중에 기억하는 게 이렇게 사달이 난 원인이다.

 
그 사람 앞에서 고백하는 게 너무 떨려서 입도 뻥긋하지 못할 거 같은데 어떻게 저질러 버리거나 통과하지 못할 것 같던 시험도 어떻게 풀어낼 때면 괜히 걱정하지 말 걸 그랬다고 후회를 한 기억을 놓고 보면, 어떻게든 된다는 생각은 쓸모없는 걱정할 필요 없는 생각으로도 이어집니다. 그러니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지 말고 가능한 일이면 몸으로 직접 행동해보고 정 안된다면 손이라도 움직여서 적어보고 다시 짧게라도 정리해서 다음에 똑같은 일을 처했을 때 되돌아볼 수 있게 하자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위의 두 문단이 있게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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