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ies
서른 살 사촌의 우울(서른살 여행기)

지구에 육박하다 – 시베리아 횡단 철도 2: 시차

042.jpg
[그림 42] 객실에 있는 열차 운행 정보 – 모스크바 시간을 기준으로 작성되어 있습니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양 끝인 모스크바와 블라디보스토크의 시차는 7시간입니다. 시베리아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7일이 걸리니 열차 위에서 하루에 한 번씩 시간이 바뀌는 걸 체험할 수 있지요. 일주일 동안 매일 시계가 느려지는 건 황당한 경험입니다. 하루에 한 번만 들어도 짜증 나는 아침 알람이 두 번 울릴 수도 있고 밥을 먹었는데 또 밥때가 오기도 합니다. 그러니 밥 먹고 잠잘 시계가 아니라 제 몸 상태를 살펴야 합니다. 처음에는 시간이 조금씩 빨라지면 모스크바와 서울의 시차에 편하게 적을 있을 거 같았는데 시간이 바뀌는 건 1시간이나 9시간이나 똑같이 피곤한 일이더군요.

어렸을 때 『80일간의 세계 일주』라는 소설을 각색한 만화를 읽었습니다. 주인공이 친구들과 80일 동안 세계 일주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해 내기하는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은 80 만에 지구 바퀴를 도는 일이 가능하다고 하고 출발했지만 아쉽게 81일째에 도착합니다. 주인공은 하루 차이로 내기에 져서 망연자실했는데 사실 시차 덕분에 하루를 번 사실을 알고 황급히 도착 지점으로 가서 내기의 승자가 됩니다. 이 만화를 볼 때 저는 여기 나오는 시차가 그렇게 궁금했다. 그렇다고 저 소설의 주인공처럼 지구를 한 바퀴 돌면서 시차를 체험하겠다는 포부는 갖진 못했지요.

사실 시차가 궁금했던 건 휴일을 더 오래 겪고 싶은 놀부 심보 때문입니다. 해가 더 빨리 뜨는 서울에서 12시면 베이징은 11시니 휴일이 끝나기 전에 베이징으로 가는 겁니다. 그리고 베이징의 휴일이 끝나기 전에 또 서쪽으로 가는 거지요. 이때는 날짜 경계선을 몰라서 이렇게 서쪽으로 계속 가면 영영 휴일이 끝나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달콤한 건 또 먹고 싶고, 재미있는 거나 흥미로운 건 또 보고 싶습니다. 시차는 어렸을 적 저에게 늘 쉬고 싶은 동화적 상상을 현실화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준 아주 흥미로운 대상이지요. 그런데 이번에 전 이 흥미로운 시차를 정말로 물리도록 경험했습니다. 어렸을 때는 초콜릿을 하나씩밖에 먹지 못했는데 어른이 돼서 이 썩는다고 뭐라고 할 사람이 없으니 에비씨 초콜릿 한 봉지를 물리도록 먹는 경험과 비슷합니다.

에비씨 초콜릿 한 봉지와 시차를 한 번 경험하는 걸 비교하면 규모의 차이가 너무 납니다. 둘을 같이 놓고 비교하기에는 시차를 물리도록 경험하는 일이 너무 규모가 크지요. 그러니까 시차를 이렇게 물리도록 경험한 건 초콜릿을 맘껏 먹는 경험처럼 그냥 나이만 먹어서 된 일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제가 혼자서 엄청난 노력을 해서 이렇게 것도 아닙니다.가 신나는 경험을 물리게 할 수 있는 데에는 부모를 포함해서 참 많은 조력자 덕분이지요. 정말 고마운 일입니다.

한편으로 아무리 도움을 주고 등 떠밀어도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하게 만들 순 없습니다. 그러니 이 여행이 시작된 원인에서 제 지분을 아주 조금은 찾아볼 수 있어요. 스스로 적당히 숨 붙이고 살았다고 평가한 제 과거도 그렇게 허접한 것만으로 채워져 있는 게 아닐지도 모릅니다. 좋아 보이지 않던 과거를 조금 밝게 평가해보니 제가 허접하다고 생각한 많은 게 그렇게 무시할 만한 게 아니라는 생각도 듭니다. 제가 허접하게 생각했던 것에는 서울의 후줄근한 뒷골목 풍경이나 자기 인생을 살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으면서 남에게 꼰대질이나 하는 아재 같은 부류가 포함됩니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