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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살 사촌의 우울(서른살 여행기)

집을 나서며

나를 위해 남이 죽어줬다는 모티프는 강렬하다. 예수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대신 죽었다는 히브리의 대속죄 이야기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희생 모티프는 간혹 미담으로 뉴스에 나타나기도 한다. 자식이 부모를 위해 혹은 부모가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것 뿐 아니라 생판 모르는 남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은 이야기도 간혹 들을 수 있다. 특히나 이득이 없으면 남에게는 십 원짜리 한 장도 쓰지 않는 세상이란 걸 체감할 때는 남이 날 위해 희생한다는 이야기는 가슴 절절히 다가온다. 그래서 예전 같으면 누가 나한테 과자 한 쪼가리 준다고 하면 뭘 저런 걸 주나 싶고 밥을 산다고 해도 내가 사먹을 수 있다고 할 일을 지금은 참 고맙게 생각하고 받아먹는다. 내 돈 몇 푼 아까워서 고마운 것이 아니라 십 원도 남에게 쓰기 꺼려지는 시대에 날 위해 무언가 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좋고 고맙기 때문이다. 한 편으론 돈 만 원에 인간의 정을 느끼는 내가 한심하기도 하지만…….
공항으로 가는 그 날에도 우리집은 썩 편안하지 않았다. 다녀온 뒤에 여행 경비로 들어간 돈이 절실하게 생각될 때도 있었다. 마음이 편할리 없는 상황에서도 자식내미 여행 간다는데 별말 없이 다녀오라고 하시고 용돈도 챙겨주신 내 부모님도 참 어지간하시다. 졸업했으니 여행가니 같이 가는 철없는 말에 집을 봐야 한다는 나보다 더 어른 스런 동생도 있다. 아랫집 집사님은 윗집 청년이 여행을 간다고 하니 “좋은 추억 마니마니 담아오”라고 적힌 흰 봉투를 주셨다. 늘 고마운 사람 투성이다. 인연에 관한 법칙이란 게 있다면 나는 나도 모르게 참 선을 많이 쌓은 거다.
범죄인을 숨겨주거나 도와주면 처벌받는데 가족을 숨겨주는 건 일정 부분 형벌을 피할 수 있다. 아무리 사람 새끼가 아닌 짓을 해도 부모에게는 귀한 자식이니 감싸 줄 건데 이를 처벌하지 않는 거다. 가족 중에 나쁜 짓 한 사람을 다른 가족이 숨겨준 걸로 법적 책임을 묻지 않는 사회인 거다. 부모와 자식이 서로 감시하고 신고하는 남보다 못한 가족을 난 잘 못 그리겠다. 부모와 자식이 서로 감시하는 가족에 대한 생각이 없는 건 아니다.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그리는 영화뿐 아니라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에도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살 거면 굳이 가족이란 관계가 필요 있을까?
나는 가족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신뢰 깊은 친구나 선생과 이런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거다. 큰 실패를 해도 나 믿어주고 돌아갈 곳이 있다는 건 실제로 실패를 하던지와 상관없이 중요하다. 선택은 내가 뭐가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기초한다. 의미는 믿음과 큰 관련 있다. 믿음의 종류는 많다. 근거 있는 믿음도 있고 터무니없는 믿음도 있다. 근거가 있으면 더 든든한 믿음이 되겠지. 그렇지만 터무니없어도 무의미한 건 아니다. 한번 그냥 사본 과자가 맛있을 때도 있잖나? 근거가 있는 믿음이라고 엄청 굳건한 건 아니다. 여러 숫자와 실험을 통해 안전하다고 믿은 물질들이 사람 죽이고 환경 파괴한 일이 한 두 가지인가? 사회 제도도 마찬가지다. 해왔다고 앞으로 영원히 할 일도 아니다. 매장 하던 나라에서 화장을 이렇게 많이 할지 알았나? 혹은 법률도 늘 다시 쓰인다. 사회적으론 정말 사악한 놈이어서 최고 형을 선고받은 사람도 정말 억울할 수 있다. 형식적으로 국민 다수가 동의한 법률이 나쁜 놈으로 선고했는데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 온전히 한 개인으로 저 사람을 받아줄까? 긴 판결문과 많은 증거들을 직접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한 개인의 첫 만남을 준비할 사람이 얼마나 있겠나. 심지어 그렇게 합리적으로 판단해도 법에 문제가 있으면 어떻게 달리 봐줄 방법이 없다. 되려 모두가 나쁜 놈이라고 하는 꼴이니 선고 받은 사람이 스스로 나쁘다고 믿게 될지도 모른다. 억울한 이 사람이 자신의 억울함을 풀려면 자신에 대한 엄청난 신념을 지닌 게 아니라면 사회적으로 보면 비합리적이지만 그래도 자신을 믿어줄 사람들이 필요하다. 그래야 일단 얼굴 맞대고 이야기하고 설득할 사람이 생기기도 하고 손가락질받아도 사회 안에 살 수 있다.
여행도 돌아갈 곳이 있으니 하는 거다. 여행에서 낯섦은 부차적인 거고 방점은 돌아온 뒤에 찍혀 있다. 그러니까 여행은 도피가 아니다. 잠시 현실에서 멀어지는건 단지 너무 꽉 막혀서 보지 못한 것을 볼 수 있게 한 숨 트는 행동이다. 나에게 돌아올 곳은 남이 날 위해 뭔가 해주기도 하는 사회이고 그 안에서도 깊은 신뢰로 얽혀있는 우리집과 같은 곳이다. 집을 나섰다. 동생이 시외버스 타는 곳에 내려줬다. 가방은 학교 갈 때 맨 그 가방이다. 공항 가는 길도 중간까지는 학교가는 길과 같다. 여행을 가는지 학교에 가는지 잘 구분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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