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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살 사촌의 우울(서른살 여행기)

하차

서울에는 서울 역이 있는 것과 다르게 모스크바에는 모스크바 역이 없다. 모스크바에서 역 이름은 그 철도의 종착역 이름이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는 처음에는 야로슬로블까지 갔기에 나는 모스크바에 있는 야로슬로블 역에서 내린다. 그런데 야로슬로블에도 야로슬로블 역이 있다. 내가 탄 열차는 야로슬로블 역에서 마지막으로 5분간 정차하고 4시간 동안 종착역까지 쉬지 않고 간다.
야로슬로블 역에 도착하기 전에 화장실도 가고 내복도 껴입었다. 짐도 다 정리했다. 이제 가만히 앉아서 지금까지 봐왔던 늘 같은 풍경을 보면 된다. 하지만 해가 뜨는 시간이니 해의 위치에 따라 풍경들도 미묘하게 변화하니 지루한 일은 아니다. 일주일을 살 부대낀 열차인데 휑하니 내리는 것보다는 시간을 두고 해어지는 것도 좋다.
미리 작별 인사를 한 위 층 사람도 짐 정리를 하고 내 앞에 댄스 음악을 틀고 어색하게 앉아있다. 그는 그냥 쿨하게 떠날 것 같았다. 무언가에 의미를 두고 마음 쓸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때그때 앞에 놓인 상황에 맞춰 사는 사람. 어떻게 말하면 계획 없는 사람일 수도 있지만 다르게 말하면 쿨한 사람일 수도 있다. 사실 모든 것에 의미를 두고 소중히 하고 기억하는 것은 거의 편집증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 집에 있는데 까마귀가 울었다면 흉조라고 생각하고 마음쓸 수도 있지만 사실 자연이 그런 데에는 별 이유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냥 아무 의미를 두지 않는 것이 무병장수하는 지름길일지도 모른다.
모스크바까지 1시간 30분, 107km 남았다. 철도가 기니 해어지는 시간도 길다. 헤어지기 싫은 것과 더 있고 싶은 것은 다르다. 헤어지기 싫은 것은 현상 유지를 하고 싶은 것이고 더 있고 싶은 것은 건설적이다. 내가 종착역에 도착하기 전까지 내가 아쉬웠던 것은 헤어지기 싫기 때문이다. 일주일이 뭐라고 계속했던 것이니까 그냥 이대로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새로운 곳에 가면 또 긴장해야 하고 적응해야 하니까 말이다. 오로라를 보기 위한 여행이 어느새 시베리에 철도 위에 끈끈하게 적체되었다.
86km 남았을 즈음, 차장은 사람들에게 차표를 돌려주기 시작했다. 30분이 남으니 이제 제법 도시 외곽의 느낌이 난다. 조그마한 역을 지날 때마다 꼭 한 두 명씩은 철로를 건너 승강장에 기어올라가는 것이 보인다. 지하철 차량기지 같은 것도 보이고 정차 중인 많은 전철들도 보인다. 분주한 사람들과 높은 건물도 서서히 보인다. 이제 거의 다 왔다.
내가 탄 열차는 도착해야 할 시간에 정확히 멈췄다. 위층 사람은 작별인사를 다시 한 번 나누고 먼저 내렸다. 나도 옷을 입고 가방을 메고 열차에서 내렸다. 물론 위 층 사람은 이미 어디론가 사라졌다. 모스크바의 공기는 블라디보스토크 보다는 덜하지만 매캐했다. 차장이 나와서 사람들을 배웅하고 있었다. 차장이 이렇게 따듯한 미소를 짓는 것을 처음 봤다. 그리고 끝이다. 열차 앞에 갈 수있는 철로는 더 이상 없다. 열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혼자 짐을 들고 역에서 멀어지거나 마중 나온 사람들과 깊은 포옹을 한다. 연고도 없는 땅에 날 마중할 사람은 없으니 일단 사람이 많이 가는 방향으로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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