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ies
서른 살 사촌의 우울(서른살 여행기)

D-0

이제 모스크바까지 24시간도 남지 않았다. 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이 있어 중간중간 눈치를 보며 조용히 내 욕구를 해소해야 하는 상황이 조금 귀찮기는 했지만 다시 못 할 짓은 아니다. 이제  <<론리 플레닛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표지에서 본 풍경이 창밖에 나타난다. 모스크바에 가까워서인지 철도와 관련된 디자인이 회색 바탕에 빨간색 표시로 통일되는 것이 보였다. 아무 짓도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

Categories
서른 살 사촌의 우울(서른살 여행기)

위 칸 사람

모스크바를 향한 지 6일째다. 오늘은 드디어 거지꼴을 참지 못하고 처음으로 면도하고 머리를 감았다. 왠지 쓸모가 있을 거라는 촉이 와서 다 먹고 버리지 않은 견과류 캔이 있었다. 촉대로 머리를 감기 위해 바가지로 잘 썼기에 꽤 뿌듯했다. 그리고 별 준비 없이 음식도 사서 쟁였는데 얼추 부족하지도 남지도 않은 점도 뿌듯했다. 이제 먹는 것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

Categories
서른 살 사촌의 우울(서른살 여행기)

시작 즈음

철학과를 졸업했다. 정말 가고 싶었던 철학과다. 나는 잘 다니던 건축공학 전공을 4학기째에 그만두고 잠시 여행을 다녀온 뒤 수능을 다시 봤다. 학교에 새로 입학하니 어색했다. 나이 차이가 나서이기도 하지만 나와 동기가 된 이들은 글도 잘 쓰고 말도 잘했다. 나는 뭐 했냐는 생각에 부끄러움이 추가 되었다. 시간이 지나고 철학과가 익숙해졌다. 마지막 학기는 읽어도 모른다는 생각에 책도 한 […]

Categories
서른 살 사촌의 우울(서른살 여행기)

새로운 만남

많은 사람이 떠난 자리들은 곧 다시 채워졌다. 내 윗 자리도 마찬가지다. 내가 침구를 정리하고 테이블을 만들어놨는지 아니면 자리를 찾는 사람이 와서 테이블을 만들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여튼 새로 온 사람은 내 앞에 앉았다. 나를 보고 앉지는 않고 복도를 향에 앉아서 손을 밖으로 펼쳐보이거나 머리를 감싸는 쥐었다. 내 앞에 앉은 사람은 늘 그랬다. 다른 이들과 다르게 […]

Categories
서른 살 사촌의 우울(서른살 여행기)

헤어짐

시베리아 횡단 철도에 오른지 5일째다. 노보시비리스크라는 큰 도시를 지나는 날이어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내리고 탔다. (열차에 올라 처음으로 방음벽을 보기도 했다.) 내가 탄 칸에 블라디보스톡부터 모스크바까지 쉬지 않고 간 사람은 나와 차장 두 명뿐이었고 자리는 중간중간 비긴 했지만 거진 사람들이 있었으니 중간에 사람들이 많이 오간 것이다. 그런데 유독 이날은 그나마 오래 보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내렸다. 내 […]

Categories
서른 살 사촌의 우울(서른살 여행기)

저녁 열차 풍경

시베리아에 오른 지 4일째가 되는 저녁에 열차는 이란스카야 역에서 22분 동안 멈췄다. 정말 짧게는 1분만 멈추고 길어야 5분이니 22분이면 정말 오래 서 있는 거다. 보통 사람들은 이 시간 동안 밖에 나가서 담배를 피우거나 먹을 것을 사온다. 차장은 흔히 말하는 빠루, 그러니까 노루발을 들고 열차 차륜을 툭툭 쳐서 점검하고 도끼로 얼음을 제거한다. 유난히 사람들이 많이 나가기에 […]

Categories
서른 살 사촌의 우울(서른살 여행기)

오류 발견

나는 어제 시베리아 횡단 철도에 올라 4일째에 견과류 캔을 버리지 않고 머리를 감았고 배터터리를 더 이상 충전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고 적었다. 그런데 일기를 더 살펴보니 터리를 충전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것은 5일째이고 머리를 감은 것은 6일 째다. 날짜를 모호하게 써놓은 것도 아니고 4일 째라고 명확히 써놓고 5일과 6일째에 있던 일을 적는 것은 해서는 안 될 짓이다. 여기서 […]

Categories
서른 살 사촌의 우울(서른살 여행기)

익숙함과 속단

시베리아 횡단 철도에 오른 지 4일 째다. 창밖은 나무 종류가 조금씩 변하기는 했지만 늘 같은 풍경이 지나간다. 보이는 건물들도 소련의 영향인지 모두 비슷비슷하다. 밖과 다르게 열차 안은 따듯하다. 옆자리에서는 한 할배가 허리 아픈 할매를 눞혀놓고 고쳐보겠다고 뭔가 열심히 하고 있다. 먹을 것을 가득 싼 봉지도 가벼워졌고 알파벳을 잘못 읽고 산 탄산수는 이제 어느 정도 맹물이 […]

Categories
서른 살 사촌의 우울(서른살 여행기)

무시할 수 없는 작은 것들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양 끝인 모스크바와 블라디보스톡의 시차는 7시간이다. 열차를 타면 하루에 한 번은 시간이 바뀌는 것을 체험할 수 있다. 일주일 동안 매일 시계가 느려지는 것은 골때리는 경험이다. 하루에 한 번만 들어도 짜증 나는 아침 알람이 두 번 울릴 수도 있고 밥을 먹었는데 또 밥때가 온다. 어렸을 때 <80일간의 세계 일주>라는 소설을 각색한 만화를 읽었다. […]

Categories
서른 살 사촌의 우울(서른살 여행기)

우발성, 가능성, 실존

새벽에 열차가 이르쿠츠크 역에 멈췄다. 나는 이르쿠츠크를 귀에 못이 박이게 들었다. 고등학교 세계지리 시간에 세상에서 가장 추운 장소로 소개되었고 가장 춥다는 대표 성질 덕분에 시험에도 자주 등장했다. 세계지리 선생은 수업에서 이르쿠츠크가 나올 때면 오줌 싸면 얼어서 기둥이 된다는 소리를 하곤 했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이르쿠츠크를 지나간다고는 생각지 못했다. 러시아의 독특한 거소 신고 제도 때문에 이르쿠츠크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