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모스크바까지 24시간도 남지 않았다. 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이 있어 중간중간 눈치를 보며 조용히 내 욕구를 해소해야 하는 상황이 조금 귀찮기는 했지만 다시 못 할 짓은 아니다. 이제 <<론리 플레닛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표지에서 본 풍경이 창밖에 나타난다. 모스크바에 가까워서인지 철도와 관련된 디자인이 회색 바탕에 빨간색 표시로 통일되는 것이 보였다. 아무 짓도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모스크바 향한다는 마음에 걱정이 덜했고 그래서인지 시간이 잘 가지 않았다. 감자 과자인 레이를 먹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 6일 정도 열차에서 보낸 것인데 정이 들었는지 여행이 아직 한참이나 남았는데 이제 다 끝났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끝난다는 생각이 들면 그간 있던 일을 돌아보고 앞으로 어떻게 살지 생각하곤 하는데 지금 당장을 보지 못하고 오지도 않을 미래를 걱정한다는 점에서 좋지 않은 습관이다. 내가 보낸 시간들이 늘 좋지는 않을 텐데 본전 생각에 어떻게든 지난 시간에서 의미를 짜내서 박제하려고 하는 점에서도 그렇다.
어렸을 때 우리 집 안방에는 삼성 텔레비전이 있었다. 브라운관 하단 중앙에는 “SAMSUNG”이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영어를 배우지 못한 어린이집 다니는 꼬맹이었고 추측건대 저 영어는 분명 삼성이라고 읽는 것 같은데 왜 영어와 한글의 음소가 각각 7개와 6개로 다른지 그런데 왜 “삼성”으로 읽는지 궁금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천성이 개을러서 궁금해하고 말았다. 그런 꼬맹이가 어설프게 영어도 배우고 러시아 알파벳도 읽을 줄 알면서 모스크바로 향하고 있다는 점은 나에게는 의미 있는 일이다.
철학과를 졸업하고 정신이 빠진 것은 어떻게든 될 거라는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못 할 것 같은 과제도 닥치면 해결되거나 정말 못 견딜 것 같은 상황도 실상 처하면 어떻게든 살게 된다는 것을 그 조금을 살면서 경험하고 은연중에 기억하는 것이 원인이다. 결국 어떻게든 된다는 생각은 쓸모없는 걱정할 필요 없는 생각으로도 이어진다. 그러니 뭐라도 하고 한 것은 잊지 말고 내 말로 짧게라도 정리해서 다음에 똑같은 일을 처했을 때 되돌아볼 수 있게 하자고 마음먹었다.
지금까지 같이 앞으로도 별일 없이 다 끝날 것을 생각했는데 영락없이 또 새로운 일이 생겼다. 건너편에 앉은 20살 남짓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사과를 주고는 갑자기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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