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에서 내려 사람들 무리에 휩쓸려 가는데 기름지게 생긴 경찰이 나를 잡으며 “빠스뽀르뜨”라고 말했다. 러시아어 수업시간에 들었던 기억인 것 같은데, 러시아에서 경찰이 여권을 보여달라고 하면 꼭 두 손으로 여권을 잡고 보여주라고 했다. 아니면 여권을 채가서 귀찮게 군다고. 그래서 그렇게 보여주고 다시 길을 나섰다. 종착 역에서 지하철로 가는 지하보도는 좁진 않았지만 낮았다. 조금더 걸어가니 개찰구가 있었다. 표 […]
하차
서울에는 서울 역이 있는 것과 다르게 모스크바에는 모스크바 역이 없다. 모스크바에서 역 이름은 그 철도의 종착역 이름이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는 처음에는 야로슬로블까지 갔기에 나는 모스크바에 있는 야로슬로블 역에서 내린다. 그런데 야로슬로블에도 야로슬로블 역이 있다. 내가 탄 열차는 야로슬로블 역에서 마지막으로 5분간 정차하고 4시간 동안 종착역까지 쉬지 않고 간다. 야로슬로블 역에 도착하기 전에 화장실도 가고 내복도 […]
마지막 날
난 살면서 기차를 탄 기억이 별로 없다. 두 번인가? 세 번? 그렇다고 기차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승강장이 밖으로 노출된 역에서 전철을 탄다 치면 제일 끝쪽으로 가서 다가오는 열차 보는 것을 좋아하고 혹여 통과하는 기차가 있을 때면 묘하게 즐겁다. 수원역에서 서울에 갈 일이 있으면 전철 말고 기차 타고 갈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기차를 잘 타지 […]
감자 퓌레를 나눔
사과 소년은 해가 어둑할 즈음 떠났다. 시간이 좀 더 시나고 위층 사람은 누워있었고 나는 마지막 남은 “도시락”을 먹었다. 이제 내일 아침에 인스턴트 감자퓨레를 먹으면 따듯한 음식을 먹을 수 있다. 설국 열차에서 양갱같은 음식을 먹는 것에 비하겠냐마는 정말 인스턴트로 보낸 지난 시간과 좁은 3등 객실 거기에 추운 눈밭 위의 철도라는 점은 설국 열차를 떠올리게 했다. 내가 […]
가방
예비군 훈련에 가면 일상에서 보기 어려운 사람들이 참 많다. 나보다 어린데 결혼한 사람이 한둘은 꼭 있는 것도 좀 어색한 일이지만 신기하게 어디서 정말 말 안 듣는 사람들만 골라 온 것 같다. 어칠어칠하며 동네에서 껌 좀 씹는 형님의 느낌을 풍기는 사람도 참 많다. 서바이벌 게임을 한다치면 더워죽겠는데 거추장스럽게 보호장구도 차고 하니 정말 모두가 약속이나 한 것처럼 […]
사과소년
이제 모스크바 시간대에 들어왔다. 얼어 있는 강이 낯설지 않았다. 낮에 잠을 안 자니 시간이 참 안 갔다. 나중에 이 지루한 시간이 생각날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그 아쉬움 조차 까먹어서 또 소중한 시간을 낭비할 거다. 졸업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철학과에 다닌 시간들이 흐릿하다. 철학과에 오기까지는 참 많은 고민을 했는데, 왜 오게 되었는지도 잘 기억나지도 않는다. 그때 […]
D-0
이제 모스크바까지 24시간도 남지 않았다. 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이 있어 중간중간 눈치를 보며 조용히 내 욕구를 해소해야 하는 상황이 조금 귀찮기는 했지만 다시 못 할 짓은 아니다. 이제 <<론리 플레닛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표지에서 본 풍경이 창밖에 나타난다. 모스크바에 가까워서인지 철도와 관련된 디자인이 회색 바탕에 빨간색 표시로 통일되는 것이 보였다. 아무 짓도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
위 칸 사람
모스크바를 향한 지 6일째다. 오늘은 드디어 거지꼴을 참지 못하고 처음으로 면도하고 머리를 감았다. 왠지 쓸모가 있을 거라는 촉이 와서 다 먹고 버리지 않은 견과류 캔이 있었다. 촉대로 머리를 감기 위해 바가지로 잘 썼기에 꽤 뿌듯했다. 그리고 별 준비 없이 음식도 사서 쟁였는데 얼추 부족하지도 남지도 않은 점도 뿌듯했다. 이제 먹는 것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
시작 즈음
철학과를 졸업했다. 정말 가고 싶었던 철학과다. 나는 잘 다니던 건축공학 전공을 4학기째에 그만두고 잠시 여행을 다녀온 뒤 수능을 다시 봤다. 학교에 새로 입학하니 어색했다. 나이 차이가 나서이기도 하지만 나와 동기가 된 이들은 글도 잘 쓰고 말도 잘했다. 나는 뭐 했냐는 생각에 부끄러움이 추가 되었다. 시간이 지나고 철학과가 익숙해졌다. 마지막 학기는 읽어도 모른다는 생각에 책도 한 […]
새로운 만남
많은 사람이 떠난 자리들은 곧 다시 채워졌다. 내 윗 자리도 마찬가지다. 내가 침구를 정리하고 테이블을 만들어놨는지 아니면 자리를 찾는 사람이 와서 테이블을 만들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여튼 새로 온 사람은 내 앞에 앉았다. 나를 보고 앉지는 않고 복도를 향에 앉아서 손을 밖으로 펼쳐보이거나 머리를 감싸는 쥐었다. 내 앞에 앉은 사람은 늘 그랬다. 다른 이들과 다르게 […]